P. Gasol - C L.A. Lakers 가솔이 없으면 레이커스는 흔들!
K. Durant - F Oklahoma City 듀란트 계속 성장 중.
D. Nowitzki - F Dallas 노비츠키. 댈러스의 희망.
Z. Randolph - F Memphis 랜돌프. 자리 잡았네...
C. Paul - G New Orleans 크리스 폴.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한 명.
B. Roy - G Portland 로이의 화려함은 따라갈 자 없는 듯.
D. Williams - G Utah 폴과 함께 최고의 포인트 가드 자리를 놓고 경합 중.
동부 컨퍼런스 리저브:
A. Horford - C Atlanta 대학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하네...센터로 합격.
C. Bosh - F Toronto 역시 최고의 파포 겸 센터. 전성기에서 꺾이는 느낌.
P. Pierce - F Boston 피어스. 셀틱스의 터줏대감.
G. Wallace - F Charlotte 월러스. 꾸준남.
J. Johnson - G Atlanta 애틀랜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
R. Rondo - G Boston 론도. 많이 컸다.
D. Rose - G Chicago 와! 2년째에 올스타가 됐구나!
노스캐롤라이나대 출신인 컵책 단장 및 부사장은 1976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같은 해 NBA 드래프트에서 워싱턴 불리츠(위저즈)에 의해 전체 13번으로 지명돼 프로생활을 시작한 바 있는 선수 출신이다.
워싱턴에서 스타로 자리잡았던 그는 1981년 레이커스와 계약하며 '호숫가의 사나이‘가 됐다. 그러나 첫 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한 그는 재활 치료 중 UCLA에서 MBA 과정을 시작했다. 레이커스의 프런트 오피스 일을 돕기 위한 준비였다.
이후 기적처럼 코트에 돌아온 컵책은 1985년에 레이커스의 챔피언 등극을 도운 후 1986년부터 단장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농구팀 운영 책임자였던 웨스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컵책은 14년간 카리스마가 넘치는 단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지난 2000년 웨스트가 현직에서 물러나자 새로운 단장으로 취임했다.
‘쇼타임’때의 레이커스는 보스턴 셀틱스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면서 80년대를 풍미했던 팀. 매직 존슨, 커림 압둘 자바, 제임스 워디, 바이런 스캇 등으로 이뤄진 ‘쇼타임’ 레이커스는 NBA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리그로 발돋움 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바 있다.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이 이끌었던 현재의 레이커스도 막강하다. 한때 3년 연속 챔피언에 오르며 무적함대를 자랑했다. 레이커스 90년대에 시카고 불스가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레이커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80년대의 팀과 현재의 팀이 맞붙는다면 80년대의 팀이 우세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쇼타임’ 레이커스의 일원이자 '샤크-코비' 시대에 뉴저지 네츠의 감독이었던 바이런 스캇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매치업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센터간의 대결
샤킬 오닐은 커림 압둘 자바를 상대로 지금처럼 득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점도 많을 것이다. 압둘 자바의 스카이 훅 샷을 막을 선수는 아무도 없다. 또 압둘 자바는 근성이 있는 선수다. 그는 화나면 더욱 점수를 올리는 선수다.
▶슈팅 가드의 대결
‘쇼타임’ 레이커스의 슈팅가드였던 스캇은 “솔직히 이 매치업은 내가 자신이 없다. 나는 경기 내내 코비 브라이언트를 밀착 마크하느라 시간을 다 보낼 것이다. 슈팅 가드 싸움에서는 우리가 밀린다”고 말했다.
▶포인트 가드 대결
매직 존슨을 막을 포인트 가드는 없다. 코비가 매직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존슨이 포스트 플레이를 하면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다. 데릭 피셔나 린지 헌터와 같은 키작은 가드들은 더더욱 매직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포워드의 대결
제임스 워디를 로버트 오리가 막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키가 크면서도 몸이 가드 못지 않게 빠른 워디를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밝은터]
미니 박스 전설적인 아나운서 칙 헌은 누구인가
LA 레이커스 중계의 ‘전설적인 목소리’ 칙 헌이 2002년 8월5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칙 헌은 ‘슬램 덩크’등 그동안 숱한 신생어를 만들어내며 농구팬들의 사랑을 받아 온 언어의 마술사. 이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 그의 ‘농구 중계’ 일생을 담아봤다.
◇ 칙 헌은 누구인가
칙 헌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일단 중계석에 앉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스포츠 중계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1916년 11월27일 일리노이주 오로라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프랜시스 대일 헌이다. 칙(chick)이라는 별명은 AAU 농구 선수였던 시절 운동화가 든 박스를 받았는데 그 안에 치킨(chicken)만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됐고 이때부터 동료들이 ‘칙(chick)’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난 56년 LA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LA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USC 풋볼과 농구의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라디오 토크쇼를 진행하며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60년대에 에미상을 두 차례나 수상 했던 헌은 레이커스가 미니애폴리스에서 LA로 옮긴 61년부터 레이커스의 ‘플레이-바이-플레이’ 중계 아나운서가 된 이후 2002년 6월12일 뉴저지 네츠와의 챔피언십 결정전 4차전으로 끝으로 42년간의 중계 일생을 마감하게 됐다.
특히 지난 65년 11월21일부터 2001년 12월16일까지 36년동안 3천338경기에 연속 마이크를 잡았다. 칙 헌이 마이크를 잡았던 기간 레이커스는 총 36만2천32득점에 2천74승을 거뒀고 8차례나 NBA정상에 올랐다.
제리 웨스트, 윌트 체임벌린, 커림 압둘 자바, 매직 존슨,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이 챔피언에 오르는 장면을 목격하는 등 232명의 플레이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연재/NBA 30개구단 역사 |
2010/01/06 16:00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포틀랜드 블레이저스는 1970년 창단한 구단으로 오리건주의 유일한 메이저 프로 스포츠 구단이다. 오리건주에서 유일한 프로 구단이다 보니 1977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814경기 연속 티켓 매진을 기록하는 등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는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1977년은 블레이저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NBA 챔피언이 된 해이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블레이저스는 90년대 초반이 전성기였다. 당시 두 번이나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주인 폴 앨런이 구단주로 있는 이 팀의 단장은 케빈 프리처드이고 네잇 맥밀런이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블레이저스는 과거 하승진의 소속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승진은 지난 2004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46번으로 블레이저스에 지명됐지만 46경기만 뛰고 NBDL(하위리그)을 전전했고 이후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됐다. 벅스에서도 방출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블레이저스는 드래프트에서 불운한 편이었다. 특히 1984년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을 뽑지 않고 샘 보위를 지명한 것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었다. 그런 팀이 23년 후인 2007년 1번 지명권으로 그렉 오든을 지명했는데 오든은놀라운 성적을 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상에 시달리며 팀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 구단은 2007-08시즌을 우울하게 맞은 바 있다. 오든이 부상으로뛰지 못하자 암울한 분위기였던 것. 블레이저스는 2007년 11월30일까지 암울한 분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2007년 12월부터 있었다. 이 팀은 2007년 12월3일부터 30일까지 13연승을 내달렸던 것. 블레이저스는 이후 서부컨퍼런스에서 중상위권의 팀이 됐다.
블레이저스의 상승과 뉴올리언스 호네츠의 급상승은 서부 컨퍼런스 전체 그림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과거 같았으면 승률 5할 안팎의 기록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6할 승률 안팎이 아니면 서부 컨퍼런스에서 포스트 시즌 진출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블레이저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가. 워싱턴대 출신의 슈팅 가드 브랜던 로이의 발돋움이 눈에 띄었다. 로이는 신인왕 출신으로블레이저스의 얼굴마담 노릇을 했다. 로이는 득점력이 높으면서도 어시스트를 잘하는 선수다.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를 지명한 후 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케빈 맥헤일 단장은 후회 막심할 것이다. 로이가 뛰어난 선수임은 모두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것으로 생각한 전문가들은 사실 없었다.
보스턴 셀틱스의 닥 리버스 감독은 2007년 로이에 대해 "그는 MVP급 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리버스의 칭찬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로이는 슈팅 능력이 좋고, 공을 잘 다루고, 수비가 뛰어나다. 그는 상대팀의 최고 선수를 매일 밤 방어한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에 로이는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은 소속팀 승리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쭐하지 않고 더 좋은 선수가 되는 데 힘을 쏟겠다는 게 로이의 반응이었다.
블레이저스 팬들은 또한 포워드겸 센터인 라마커스 얼드릿지의 급성장에 놀랐다. 신인 시즌에 9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했던 얼드릿지는두 번째 시즌에 A급 빅맨이 됐다. 얼드릿지는 로이와 함께 블레이저스의 '원-투 펀치'가됐다.
네잇 맥밀런 블레이저스 감독은 그러나 두 선수에 의존하는 경기를 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고른 기여를 강조했다. NBA 전문가들은 두 스타 선수를 중심으로 벤치 선수들의 기여도가 높은 블레이저스가 수년 내에 막강 전력을 자랑할 것으로 예상했다.
만약 오든이 완전한 몸 상태로 복귀한다면 블레이저스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구가했던 전성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블레이저스는 클라이드 드렉슬러, 테리 포터, 클리프 로빈슨, 저롬 커시, 케빈 덕워스, 벅 윌리엄스로 이뤄진 막강 화력의 군단이었다.
1988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창업주였던 폴 앨런이 블레이저스 구단을 사들인 후 이 팀은 크게 달라졌다. 선수를 대폭 교체하고 릭 애들먼에 감독 자리를 맡기면서 포틀랜드는 완전히 다른 구단이 됐다. 이 구단은 1990년과 1992년에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는데 불행히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카고 불스의 전성기 때 결승에서 만나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다.
1994년 밥 윗시트가 단장이 되면서 파워군단은 해체됐다. 윌리엄스, 포터, 로빈슨, 커시 등이 블레이저스를 떠났다. 1995년 가을 마침내 2만 명이 매경기 모여들었던 로즈 가든은 연속 매진 기록은 중단됐다.
블레이저스의 재건 노력은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챔피언이 될 기회를 얻었다. 스카티 피핀, 라시드 월러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등을 영입한 이 구단은 90년대 후반 NBA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번번이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미끄러졌다. 2000년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서는 LA 레이커스에 거의 승리했다가 막판 극적인 역전골을 허용하면서 역전패했다. 당시 블레이저스는 리그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지만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01년, 2002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1라운드 탈락의 쓴잔을 마신 블레이저스는 2008년까지 플레이오프에도 못 나가는 팀으로 전락했다.
39년 동안 블레이저스는 플레이오프에 27번 진출했고 1977년 딱 한 번 NBA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NBA 챔피언 결정전에는 2번 나갔고 시즌 최고 승률은 1991년에 기록했다 (63승19패). 1977년 챔피언십 당시 블레이저스에는 전설적인 지도자 잭 램지와 대학농구의 전설적인 선수 빌 월튼이 있었다.
특집/추억의 기사 |
2010/01/05 17:00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서울 중앙일보 게재일 : 1996년 10월 17일 [40면]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섀킬 오닐이 달라졌다」-.
지난주말 개막된 미국 프로농구(NBA)시범경기에서 올랜도 매직에서 LA 레이커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처음 코트에 나선 「공룡센터」섀킬 오닐을 지켜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216㎝.1백36㎏의 거구인 오닐은 올랜도 매직 시절 폭발적인 덩크슛으로 팬들을 매혹시켰지만 리바운드와 패스에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닐은 덴버 너기츠와의 첫 시범경기에서 슈팅 13개를 시도해11개를 성공시키는등 25점을 올리며 팀이 1백11-1백1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록만 봐서는 NBA 통산 평균득점이 27.2점인 그로선 그저 평범한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게임을 팀멤버와 함께풀어가는 모습에서 한결 성숙해졌다는 것을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무엇보다 눈에 띄게 향상된 부분은수비와 공격에서 부지런히 움직여 슈터들이 편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점과 리바운드를 위한 몸싸움에서도 과거에 비해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
또 수비도 매직 시절보다 더 거칠어져 상대방 센터의 골밑공격을 원천봉쇄하는데 성공했고 수비 리바운드를 하자마자 속공으로 연결시키는 기술이 크게 향상됐다.너기츠의 버니 비커스태프 코치는 『오닐의 경기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그가 팀 플레이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오닐 자신도 『코치가 나에게 맡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리바운드에 더 많은 신경을 쓰라는 지시였다.또 레이커스의 경기 스타일인 속공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0/01/05 16:57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매직 존슨의 코트 비전과 마이클 조던의 운동 능력을 가진 선수."
2002년 당시 18세의 고교 스타 르브론 제임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제2의 매직`도 `제2의 조던`도 아닌 두 선수의 장점을 모두 갖춘 선수라니, 과연 그는 어떤 능력의 선수이기에 이런 칭송을 받았던 것일까.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PicApp
■ 천재 농구 스타
2002년 11월 오하이오주 애크론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졸업반이었던 제임스는 프로농구(NBA) 스타 보다 더 많은 팬을 확보한 천재 농구 소년으로 통했다. 제임스가 다녔던 세인트빈슨트-세인트 매리 고교는 당시 홈경기를 6천명 수용의 대학교 체육관에서 치렀다. 고등학교 체육관은 `르브론 팬`의 3분의 1도 채울 수 없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대학 체육관으로 옮겨서 홈경기를 치렀음에도 티킷은 거의 매경기 매진됐다.
많은 팬의 요청에 따라 제임스의 경기는 페이-퍼-뷰(Pay-per-view: 유선방송 회당 유료 시청 프로그램)를 통해 오하이오주 케이블 방송 시청자들에게 선보여졌다. 전국 팬들도 르브론에 열광했다. ESPN 방송은 이 같은 제임스의 인기를 감지하고 2002년 12월 1만3천6백석의 대형 체육관에서 열렸던 세인트빈슨트-세인트 매리 고교의 경기를 전국으로 생중계했다.
■ 제임스에 열광했던 이유
농구 팬들이 18세에 불과한 제임스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마이클 조던의 전성시절 못지 않은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유연함과 조던을 능가하는 점프력으로 그의 플레이를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그러면서도 제임스는 이기적이지 않았다. 개인 플레이를 최대한 자제했던 선수다.
그의 코트 전체를 보는 능력 및 패싱능력은 매직 존슨을 연상케 했다. 그렇다면 수비 능력은? 손이 빠르고 센스가 좋아 상대 공격수들을 쉽게 당황케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공격할 때는 매직 존슨, 조던을 합쳐 놓은 모습이고 수비할 때는 개리 페이튼과 비슷하다고 전문가들은 평했다. 그렇다고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투 성공률이 낮은 편(당시 60%)이고 파워가 부족했다. 두 가지는 그러나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향상했다.
■ NBA 인기를 끌어 올릴 스타로 주목
제임스는 2003년 고교 졸업 후 NBA 진출을 선언했다. 전체 1번으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지명됐다. 신발 회사들은 그가 프로로 뛰어들면 엄청난 액수로 계약 맺을 준비를 이미 마쳤고 실제 그가 NBA에 진출하자 엄청난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연간 4백만 달러에서 1천만 달러 수준의 다년 계약이 제임스를 유혹했다. 제임스는 이탈리아 프로클럽으로부터 8백만 달러의 연봉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기도 했다.
조던의 전성기 시절 그의 컴백과 은퇴가 뉴욕 증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처럼 제임스도 NBA 스타로 자리 잡게 되면 미국 경제를 흔드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 제2의 조던? No! 제1의 제임스
제임스는 2001년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조던 농구 캠프에 NBA 스타, 대학 농구 스타들과 함께 초대된 바 있다. 당시 제임스는 고등학생임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제2의 조던`이 탄생했다고 외쳤다. 제임스는 이에 대해 "내 목표는 제2의 조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1의 제임스가 되는 것"이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물론 조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는 "조던의 말은 대통령의 말 보다 더 파워가 있다.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고 성숙된 발언을 했다.
그의 가능성을 감지한 미 주류 언론들은 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그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평생 한 번 표지 모델로 나서기 힘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는 2002년 2월 `선택된 자(The Chosen One)`라는 표지 제목과 함께 제임스를 표지 모델로 내보냈다. 고교 3학년에 재학중인 농구 선수가 이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농구판 타이거 우즈 될 것
당시 제임스의 사인이 포함된 잡지는 e베이에서 2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또한 제임스와 관련된 용품이 경품 사이트에서 90가지가 넘게 거래됐다는 후문이다.
그가 가는 곳이면 마치 유명 영화배우가 뜬 것처럼 경비가 심해졌다.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는 "골프가 타이거 우즈의 등장으로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제임스의 NBA 입성은 농구를 조던 시대 이후 제2의 중흥기로 이끌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농구판의 타이거 우즈가 됐을까. 아직까지는 아니다. 챔피언 반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2003-04시즌에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다. 고졸 신인치고는 꽤 좋은 성적인 20.9득점, 5.9어시스트, 5.5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것. 루키 시즌에 20득점-5어시스트-5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는 오스카 로벗슨과 마이클 조던 2명뿐이었다.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 덕분에 이전 시즌보다 18승을 더 올려 35승47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 플레이오프 2년 연속 진출 실패
두 번째 시즌에 르브론 제임스는 NBA 올스타로 선정됐다. 제임스는 2004-05시즌에 역사상 가장 어린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그리고 NBA 베스트5에 선정됐다. 27.2득점, 7.2어시스트, 7.4리바운드, 2.2스틸이 그의 개인 성적이었다. 42승40패를 기록한 캐벌리어스는 역시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 특급 대열에 들어가기 시작
2005-06시즌은 제임스가 마침내 특급 대열에 들어가는 시즌이었다.
제임스는 2005-06시즌에 31.4득점, 7리바운드, 6.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황제 즉위식은 연기됐다. 캐벌리어스가 플레이오프에 처음으로(제임스가 유니폼을 입은 후 처음) 진출했지만 챔피언 등극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즌에는 캐벌리어스의 선전이 인상적이었다.
2006 NBA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전, 캐벌리어스는 1라운드 또는 2라운드에서 탈락할 팀으로 평가됐다. 1라운드에서 워싱턴 위저즈에 4승2패로 승리해 2라운드에 진출한 캐벌리어스는 동부 최강이자 리그 전체에서 최고 승률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만났다.
전문가들 중 캐벌리어스가 승리할 것이라고 간 큰 예상을 한 사람은 없었다. 피스톤스는 예상대로 1,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쾌속항진을 하는 듯했다. 캐벌리어스가 3차전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이라는 생각을 했다. 4차전에서 캐벌리어스가 이겼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두 번 떨어질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5차전에서 캐벌리어스가 승리하고 시리즈를 3승2패로 앞서 나가자 상황은 당황스럽게 됐다. 캐벌리어스가 컨퍼런스 결승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캐벌리어스는 남은 2경기를 모두 내주고 아깝게 탈락했다.
제임스는 시즌이 끝난 후 캐벌리어스와 연장 계약을 맺었다. 3년 계약에 4년째는 옵션이었다. 2007-08시즌을 시작으로 총 6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연장 계약이었다.
■ 가까워진 황제 즉위식
스몰 포워드인 제임스는 몸이 빠르고 점프력이 좋아 3개 이상의 포지션을 소화해낼 수 있는 NBA 선수다. 그는 파워 포워드의 신체에 포인트 가드의 코트 전체를 보는 감각과 드리블 능력을 지녔다. 제임스는 그러나 2006-07 시즌에 수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공격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수비 능력이 공격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가 들렸다. 그는 NBA 최고의 수비팀에 선발된 적이 없었다. 또한 고교 시절부터 문제점이었던 낮은 자유투 성공률(69.8%)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 밖에 나이키와 같은 회사로부터 9천만 달러의 광고 모델 계약금을 받아내 소비자들에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높은 광고 모델료는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분담 몫이기 때문이다. 2006-07시즌에 그는 캐벌리어스의 NBA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캐벌리어스는 워싱턴 위저즈, 뉴저지 네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차례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승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4전전패로 패했다. 황제 즉위식이 또 연기된 것이다.
■ 제2의 조던이 아니라 제2의 매직?
캐벌리어스 경기 전담 중계 캐스터인 조 테이트는 오하이오주 비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가 조던의 등번호였던 23번 유니폼을 입고 조던처럼 경기 시작 전에 스코어 테이블에서 송진을 공중으로 날리는 '의식'을 행하지만 그는 조던이 아니다. 제임스는 오히려 매직 존슨과 비슷한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매직 존슨과 비슷하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다재다능하면서도 동료를 믿는 선수라는 의미다. 제임스의 패스능력은 존슨의 그것 못지않다는 게 테이트의 설명. 제임스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테이트는 "르브론은 슛을 쏘는 것보다 패스를 잘하는 것을 더 즐긴다. 어린 선수인데도 팀 플레이가 무엇인지 아는 선수다"라고 칭찬했다.
■ 코비 or 르브론.
ESPN-TV는 2008년 3월 '스포츠 센터'에서 재미난 질문을 했다. 2008년 3월 현재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굴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농구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답을 했는데 모두 코비를 선택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인 내용은 코비가 뛰어난 클러치 슈터인 점과 수비가 더 낫다는 것이었다. 2007년 NBA 챔피언 결정전 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대부분 르브론을 뽑았을 것이다. 당시 르브론은 약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NBA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끌었고 코비의 LA 레이커스는 1라운드에서 탈락한 바 있다.
플레이오프가 열렸을 때 LA 타임스의 칼럼니스트가 썼던 글에는 "르브론과 코비는 비슷한 수준의 팀에서 뛰는데 르브론은 챔피언십 진출팀을 만들었고 코비는 그렇지 못했다. 르브론이 더 뛰어난 선수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르브론 제임스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선수였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에서 모두 뛰어나고 수비도 계속 향상하고 있었다. 코비보다 클러치 슈팅 능력과 수비가 약간 밀리기는 했지만 이는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부분이다. 르브론은 야투 성공률도 매년 향상되고 있고 특별히 가로채기와 블락샷이 좋아졌다. 자유투 성공률만 좀 더 높인다면 완벽에 가까운 선수가 될 선수다.
■ 실망스러운 두 시즌
2007-08시즌에 캐벌리어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3승4패로 아깝게 패했다. 7차전에서 제임스는 40득점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의 승리를 이끌지 못했다. 2008-09시즌에도 캐벌리어스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시리즈에서 올랜도 매직에 패해 역시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 제임스는 MVP로 선정됐다. NBA 진출 후 첫 MVP 수상이었다. 그는 또한 올해의 수비팀에 들어가 수비 능력 향상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제임스는 NBA 신인상(2004년), MVP (2009년), 올스타 선정 5회, 득점왕(2008년), 베스트5 3회, 베스트 수비수 5인(2009년) 등 주요한 상을 모두 받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 반지뿐이다.
글: 밝은터
■ 이름: 르브론 제임스
■ 생년월일: 84년 12월30일 생
■ 포지션: 슈팅 가드
■ 키: 6피트7인치
■ 몸무게: 215파운드
■ 태생지: 오하이오주 애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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