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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빈스 카터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0/01/13 16:18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마이클 조던의 뒤를 이을 선수로 손꼽힌 선수는 빈스 카터였다.당시 농구 전문가들은 조던의 후계자로 카터, 코비 브라이언트(LA레이커스), 앨런 아이버슨(당시 필라델피아 76ers)등을 꼽으면서도 카터를 빼놓지 않았다. 당시만해도 브라이언트는 팀 플레이가 미숙하고 아이버슨은 코트에서 이기적이고 사회에서 건실하지 못한 점이 '넘버1'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가 있었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PicApp


Magic vs. Timberwolves

그러나 카터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2'라는 별명도 언론사 기자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ESPN의 월간 스포츠 전문잡지인 'ESPN 매거진' 2000년 신년호에서 "카터는 2000년대 최고 중의 최고 스타가 될 것"이라고 강한 어조의 글을 게재했다. 그 밖의 언론도 카터의 화려한 플레이를 극찬했고 TV 방송의 스포츠 하일라이트에서 그의 멋진 덩크슛 장면은 빠진 적이 없을 정도였다.

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골든스테이트에 전체 5번으로 지명된 카터는 곧바로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4번 지명 선수였던 앤트완 제이미슨과의 맞트레이드가 일어났던 것이다. 제이미슨은 노스캐롤라이나 시절 카터의 동료이자 절친이었다.

직장폐쇄로 카터는 루키 시즌에 50경기에만 출전해 게임당 평균 18.3득점, 5.7리바운드, 3.0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18명의 기자들로 구성된 투표인단으로부터 113표를 받아 신인왕에 등극했다. 카터는 단지 덩크슛만 멋진 '단순한 선수'는 아니다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뛰어난 체력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닦은 단단한 기본기는 자신뿐만 아니라 팀이 잘하게 하는데 조예가 깊다는 칭찬이 들렸다.  

물론 팬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조던의 에어타임이 무색할 정도로 뛰어난 고공점프력으로 바스킷을 공략하는 슬램 덩크슛이었다. 조던과 카터 두 명 모두 지도한 바 있는 노스캐롤라이아대의 딘 스미스 전 감독은 "카터는 내가 본 선수중 최고의 덩크슛을 구사하는 선수다"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카터는 그러나 최고의 슬램덩크맨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슛연습을 6백개 이상 하지 않으면 연습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때론 15백 번의 슛시도를 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멋진 덩크슛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2000년 올스타전 슬램덩크 컨테스트에는 참가한 그는 놀라운 덩크로 전 세계 농구 팬들을 흥분시켰다. 이때부터 반의 인간, 반은 경이적인 존재(Half man, Half amazing)’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했다.



카터는 또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덩크로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솟아올랐다. 그는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인 프레데릭 와이스의 머리 위로 날아가 슬램덩크를 성공시켰고 이 장면은 올림픽 기간 중에 계속 방영됐다. 팀 동료였던 제이슨 키드는 내가 본 덩크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고 극찬했다.

NBA에서도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2001년 여름에 그는 랩터스와 6 9,400만 달러의 거액 계약을 맺었다. 매년 20득점 이상을 기록했던 카터 덕분에 랩터스는 인기 구단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부상이었다. 무릎 부상의 그의 앞길을 막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결장이 잦았고 소위 말하는 점프하는 이들의 무릎’(Jumper's knee)을 갖게 됐다. 무릎에 심한 이상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상과 부진으로 랩터스는 그를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했다. 카터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카터는 네츠에서 큰 기대를 걸었다. 첫 시즌에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26.8득점, 8.5리바운드로 뉴저지 팬들을 기쁘게 했다.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 네츠는 매년 플레이오프에서 조기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카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네츠는 2007 71 4 6,18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네츠에서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카터는 2009 625일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됐다. 그의 3번째 팀을 만난 것이다.

그는 생애 통산 809경기를 치러 평균 23.3득점, 5.4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8차례 NBA 올스타로 선정됐고, NBA 베스트5에 두 번 뽑혔다. 2000년에 NBA 슬램덩크 챔피언, 1999년에 신인상을 획득했다. NBA 챔피언 반지만 보태면 그의 농구 인생은 멋지게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카터는 약물 중독 치료 센터 건립을 위해 160만 달러를 기부했고 센터는 빈스 카터 생추어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터 프로필 (위키피디아)

Orlando Magic  – No. 15





Guard/Forward

Born

January 26, 1977 (1977-01-26) (age 32)
Daytona Beach, Florida

Nationality

American

Listed height

6 ft 6 in (1.98 m)

Listed weight

220 lb (100 kg)

Salary

$16,123,250[1]

College

North Carolina

Draft

5th overall, 1998
Golden State Warriors

Pro career

1998–present

Former teams

Toronto Raptors (1998–2004)
New Jersey Nets (2004–2009)

Awards

8-time All-Star
2-time All-NBA Selection
1999 NBA Rookie of the Year
2000 NBA Slam Dunk Champion
2000 Olympic Gold med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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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엘튼 브랜드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0/01/11 12:18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MVP, MVP!"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LA 클리퍼스 경기를 보면서 이런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LA 레이커스와의 대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와 같은 레이커스 선수에 대해 이런 외침이 있었지만 클리퍼스 선수가 이런 칭송을 듣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주인공은 전 클리퍼스 포워드 엘튼 브랜드. 브랜드는 지금은 필라델피아 76ers 소속이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듀크대 3학년이 되기 전에 프로 진출을 선언한 브랜드는 1999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지명됐다. 그를 지명한 팀은 마이클 조던이 은퇴한 후 재건을 노렸던 시카고 불스. 듀크대 동문의 엄청난 비난 속에 NBA에 진출한 브랜드는 첫 시즌에 20.1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한 후 스티브 프랜시스와 공동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브랜드는 다음 시즌에도 20.1득점, 10.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거의 매경기 20점과 10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리그의 최약체팀에 속했기 때문에 그를 올스타로 인식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2002년에 딱 한 번 올스타로 뽑혔지만 이것도 샤킬 오닐이 부상을 당해 대신 출전한 것이었다.

 브랜드는 불스에서 성공적인 2년을 마친 후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됐다. 브랜드는 클리퍼스 선수로는 대니 매닝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클리퍼스 최고의 선수로 자리 잡았다. 올스타 정도가 아니라 클리퍼스 팬들은 그를 격려하기 위해 "MVP, MVP!"를 외치곤 했다.

 개인 성적만으로 그는 충분히 MVP 후보에 오를만했지만 항상 팀 성적이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2005-06시즌에 브랜드는 24.7득점을 기록했고 클리퍼스는 플레이오프 6번 시드를 잡아 MVP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바로 그 시즌에 클리퍼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덴버 너기츠에 승리해 1976년 이후 첫 2라운드 진출의 감격을 누렸다. 1976년도 클리퍼스가 아닌 버팔로 브레이브스라는 이름으로 이룬 것이었다.  클리퍼스는 2라운드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피닉스 선스에 34패로 아깝게 무릎을 꿇었다. 브랜드는 그해 MVP로 선정되지 못했다.

 클리퍼스가 상승 무드를 타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클리퍼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브랜드가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 결장했기 때문이다. 브랜드의 클리퍼스와의 계약은 만료되는 상황이었다. 브랜드가 옵션 계약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브랜드는 2008 79 76ers로 이적했다. 5년 계약이었다. 클리퍼스 팬들은 실망했다. 돈 욕심에 LA를 떠난다고 비난했다. 클리퍼스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다행이었을까. 브랜드는 2009 25일 어깨 수술을 받았다. 대형 계약을 맺은 후 그가 76ers에서 뛴 첫 시즌의 경기 수는 29경기에 불과했다.



다음 시즌인
2009-10시즌에 복귀한 브랜드는 31경기에 출전했지만 주전 출전은 18경기에 불과했다. 성적도 이전 같지 않았다. 평균 20득점을 꾸준히 올려줬던 그는 76ers에서 13득점을 올리는 선수가 됐다. 노화현상이었을까. 그는 NBA 역사상 개인 통산 평균 20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한 4명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평균 득점은 19점대로 내려갔다. 평균 리바운드는 간신히 10점대를 유지했지만 이런 추세대로라면 9점대로 내려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브랜드는 클리퍼스 팬들의 비난을 받고 팀을 옮겼는데 대학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브랜드는 듀크대 2학년을 마치고 프로에 입문했다.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지명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대학을 일찍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듀크대 출신 농구 선수 중 처음으로 졸업장 없이 NBA로 간 선수로 기록됐다. 당시 브랜드가 전통을 깨자 제니퍼라는 듀크대 학생은 그에게 e-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듀크는 명문대다. 그래서 모든 선수가 졸업장을 받고자 하는데 당신이 그 전통을 무너뜨렸다. 당신은 더 이상 듀크의 가족이 아니다." 이에 브랜드는 "당신의 부모가 이 학교에 당신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잘 알고 있다. 당신과 같은(부자를 의미) 부류는 나와 같은(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과 듀크 동문이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두 사람의 의견 교환은 당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브랜드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듀크를 선택했던 것은 선수들의 졸업률이 높았기 때문인데 그런 그가 프로에 일찍 입문한 것은 의외였다. 브랜드는 그러나 듀크의 명예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듀크대 출신 중 처음으로 NBA 드래프트에서 1번으로 지명된 선수로 기록된 바 있다.

시카고 불스에 지명된 브랜드는 2년 동안 좋은 성적을 냈지만 리그 최하위팀에서 뛰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브랜드는 두 시즌을 뛴 후 곧바로 LA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됐는데 두 번째 팀 역시 서부에서 하위권 팀이었다.

 브랜드는 6피트8인치의 작은 파워포워드였기 때문에 그가 프로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그는 거의 매경기 10리바운드 이상을 잡아냈다. 10리바운드 중 공격 리바운드는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

키가 작은 그가 공격 리바운드를 잘 잡아내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에 대해 "리바운드는 결단력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나의 긴 팔과 다른 선수에 비해 볼의 흐름을 잘 읽는 능력도 있을 것이다. 나는 특히 공격리바운드를 좋아한다. 공격 리바운드를 잡는다고 해서 바로 득점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격 리바운드의 성공은 팀의 사기를 올리는 효과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브랜드는 화려한 듯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화려한 특이한 선수였다.

그 기능이 지금은 발휘되지 않고 있다. 30세의 나이 때문일까.



[브랜드 프로필]

포지션: 파워 포워드

생년월일: 1979 311

: 6피트8인치(2m3cm)

몸무게: 254파운드(115.2kg)

출신교: 듀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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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틀랜드 블레이저스는 1970년 창단한 구단으로 오리건주의 유일한 메이저 프로 스포츠 구단이다. 오리건주에서 유일한 프로 구단이다 보니 1977년부터 1995년까지 무려 814경기 연속 티켓 매진을 기록하는 등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는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1977년은 블레이저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NBA 챔피언이 된 해이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블레이저스는 90년대 초반이 전성기였다. 당시 두 번이나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주인 폴 앨런이 구단주로 있는 이 팀의 단장은 케빈 프리처드이고 네잇 맥밀런이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블레이저스는 과거 하승진의 소속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승진은 지난 2004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46번으로 블레이저스에 지명됐지만 46경기만 뛰고 NBDL(하위리그)을 전전했고 이후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됐다. 벅스에서도 방출된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블레이저스는 드래프트에서 불운한 편이었다. 특히 1984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을 뽑지 않고 샘 보위를 지명한 것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었다. 그런 팀이 23년 후인 2007 1번 지명권으로 그렉 오든을 지명했는데 오든은 놀라운 성적을 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상에 시달리며 팀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 구단은 2007-08시즌을 우울하게 맞은 바 있다오든이 부상으로 뛰지 못하자 암울한 분위기였던 것블레이저스는 2007 1130일까지 암울한 분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2007 12월부터 있었다. 이 팀은 2007 123일부터 30일까지 13연승을 내달렸던 것블레이저스는 이후 서부 컨퍼런스에서 중상위권의 팀이 됐다.

 
블레이저스의 상승과 뉴올리언스 호네츠의 급상승은 서부 컨퍼런스 전체 그림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과거 같았으면 승률 5할 안팎의 기록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6할 승률 안팎이 아니면 서부 컨퍼런스에서 포스트 시즌 진출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블레이저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가. 워싱턴대 출신의 슈팅 가드 브랜던 로이의 발돋움이 눈에 띄었다. 로이는 신인왕 출신으로 블레이저스의 얼굴마담 노릇을 했다로이는 득점력이 높으면서도 어시스트를 잘하는 선수다.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를 지명한 후 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케빈 맥헤일 단장은 후회 막심할 것이다. 로이가 뛰어난 선수임은 모두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것으로 생각한 전문가들은 사실 없었다



 
보스턴 셀틱스의 닥 리버스 감독은 2007년 로이에 대해 "그는 MVP급 시즌을 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리버스의 칭찬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로이는 슈팅 능력이 좋고, 공을 잘 다루고, 수비가 뛰어나다. 그는 상대팀의 최고 선수를 매일 밤 방어한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에 로이는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은 소속팀 승리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쭐하지 않고 더 좋은 선수가 되는 데 힘을 쏟겠다는 게 로이의 반응이었다

 
블레이저스 팬들은 또한 포워드겸 센터인 라마커스 얼드릿지의 급성장에 놀랐다. 신인 시즌에 9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했던 얼드릿지는 두 번째 시즌에 A급 빅맨이 됐다. 얼드릿지는 로이와 함께 블레이저스의 '-투 펀치' 됐다.


 네잇 맥밀런 블레이저스 감독은 그러나 두 선수에 의존하는 경기를 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고른 기여를 강조했다. NBA 전문가들은 두 스타 선수를 중심으로 벤치 선수들의 기여도가 높은 블레이저스가 수년 내에 막강 전력을 자랑할 것으로 예상했다

 
만약 오든이 완전한 몸 상태로 복귀한다면 블레이저스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구가했던 전성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블레이저스는 클라이드 드렉슬러, 테리 포터, 클리프 로빈슨, 저롬 커시, 케빈 덕워스, 벅 윌리엄스로 이뤄진 막강 화력의 군단이었다.

 1988
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창업주였던 폴 앨런이 블레이저스 구단을 사들인 후 이 팀은 크게 달라졌다. 선수를 대폭 교체하고 릭 애들먼에 감독 자리를 맡기면서 포틀랜드는 완전히 다른 구단이 됐다. 이 구단은 1990년과 1992년에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는데 불행히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카고 불스의 전성기 때 결승에서 만나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다.




 
1994
년 밥 윗시트가 단장이 되면서 파워군단은 해체됐다. 윌리엄스, 포터, 로빈슨, 커시 등이 블레이저스를 떠났다. 1995년 가을 마침내 2만 명이 매경기 모여들었던 로즈 가든은 연속 매진 기록은 중단됐다.

 블레이저스의 재건 노력은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챔피언이 될 기회를 얻었다. 스카티 피핀, 라시드 월러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등을 영입한 이 구단은 90년대 후반 NBA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번번이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미끄러졌다. 2000년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서는 LA 레이커스에 거의 승리했다가 막판 극적인 역전골을 허용하면서 역전패했다. 당시 블레이저스는 리그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지만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01, 2002,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1라운드 탈락의 쓴잔을 마신 블레이저스는 2008년까지 플레이오프에도 못 나가는 팀으로 전락했다.

 39년 동안 블레이저스는 플레이오프에 27번 진출했고 1977년 딱 한 번 NBA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NBA 챔피언 결정전에는 2번 나갔고 시즌 최고 승률은 1991년에 기록했다 (6319). 1977년 챔피언십 당시 블레이저스에는 전설적인 지도자 잭 램지와 대학농구의 전설적인 선수 빌 월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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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르브론 제임스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0/01/05 16:57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USA Basketball Senior National Team Training Day 3

"매직 존슨의 코트 비전과 마이클 조던의 운동 능력을 가진 선수."

2002년 당시 18세의 고교 스타 르브론 제임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제2의 매직`도 `제2의 조던`도 아닌 두 선수의 장점을 모두 갖춘 선수라니, 과연 그는 어떤 능력의 선수이기에 이런 칭송을 받았던 것일까.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PicApp

천재 농구 스타

2002년 11월 오하이오주 애크론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졸업반이었던 제임스는 프로농구(NBA) 스타 보다 더 많은 팬을 확보한 천재 농구 소년으로 통했다. 제임스가 다녔던 세인트빈슨트-세인트 매리 고교는 당시 홈경기를 6천명 수용의 대학교 체육관에서 치렀다. 고등학교 체육관은 `르브론 팬`의 3분의 1도 채울 수 없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대학 체육관으로 옮겨서 홈경기를 치렀음에도 티킷은 거의 매경기 매진됐다.

많은 팬의 요청에 따라 제임스의 경기는 페이-퍼-뷰(Pay-per-view: 유선방송 회당 유료 시청 프로그램)를 통해 오하이오주 케이블 방송 시청자들에게 선보여졌다. 전국 팬들도 르브론에 열광했다. ESPN 방송은 이 같은 제임스의 인기를 감지하고 2002년 12월 1만3천6백석의 대형 체육관에서 열렸던 세인트빈슨트-세인트 매리 고교의 경기를 전국으로 생중계했다.



제임스에 열광했던 이유

 농구 팬들이 18세에 불과한 제임스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마이클 조던의 전성시절 못지 않은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유연함과 조던을 능가하는 점프력으로 그의 플레이를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그러면서도 제임스는 이기적이지 않았다. 개인 플레이를 최대한 자제했던 선수다.
 
 그의 코트 전체를 보는 능력 및 패싱능력은 매직 존슨을 연상케 했다. 그렇다면 수비 능력은? 손이 빠르고 센스가 좋아 상대 공격수들을 쉽게 당황케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공격할 때는 매직 존슨, 조던을 합쳐 놓은 모습이고 수비할 때는 개리 페이튼과 비슷하다고 전문가들은 평했다. 그렇다고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투 성공률이 낮은 편(당시 60%)이고 파워가 부족했다. 두 가지는 그러나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향상했다.

NBA 인기를 끌어 올릴 스타로 주목 

 제임스는 2003년 고교 졸업 후 NBA 진출을 선언했다. 전체 1번으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지명됐다. 신발 회사들은 그가 프로로 뛰어들면 엄청난 액수로 계약 맺을 준비를 이미 마쳤고 실제 그가 NBA에 진출하자 엄청난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연간 4백만 달러에서 1천만 달러 수준의 다년 계약이 제임스를 유혹했다. 제임스는 이탈리아 프로클럽으로부터 8백만 달러의 연봉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기도 했다.
 
 조던의 전성기 시절 그의 컴백과 은퇴가 뉴욕 증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처럼 제임스도 NBA 스타로 자리 잡게 되면 미국 경제를 흔드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제2의 조던? No! 제1의 제임스

 제임스는 2001년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열린 조던 농구 캠프에 NBA 스타, 대학 농구 스타들과 함께 초대된 바 있다. 당시 제임스는 고등학생임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제2의 조던`이 탄생했다고 외쳤다. 제임스는 이에 대해 "내 목표는 제2의 조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1의 제임스가 되는 것"이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물론 조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는 "조던의 말은 대통령의 말 보다 더 파워가 있다.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고 성숙된 발언을 했다.

 그의 가능성을 감지한 미 주류 언론들은 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그에 대한 소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평생 한 번 표지 모델로 나서기 힘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는 2002년 2월 `선택된 자(The Chosen One)`라는 표지 제목과 함께 제임스를 표지 모델로 내보냈다. 고교 3학년에 재학중인 농구 선수가 이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농구판 타이거 우즈 될 것 
 
  당시 제임스의 사인이 포함된 잡지는 e베이에서 2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또한 제임스와 관련된 용품이 경품 사이트에서 90가지가 넘게 거래됐다는 후문이다.

 그가 가는 곳이면 마치 유명 영화배우가 뜬 것처럼 경비가 심해졌다.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는 "골프가 타이거 우즈의 등장으로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제임스의 NBA 입성은 농구를 조던 시대 이후 제2의 중흥기로 이끌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농구판의 타이거 우즈가 됐을까. 아직까지는 아니다. 챔피언 반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2003-04시즌에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다. 고졸 신인치고는 꽤 좋은 성적인 20.9득점, 5.9어시스트, 5.5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것. 루키 시즌에 20득점-5어시스트-5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는 오스카 로벗슨과 마이클 조던 2명뿐이었다.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 덕분에 이전 시즌보다 18승을 더 올려 35승47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플레이오프 2년 연속 진출 실패

  두 번째 시즌에 르브론 제임스는 NBA 올스타로 선정됐다. 제임스는 2004-05시즌에 역사상 가장 어린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그리고 NBA 베스트5에 선정됐다. 27.2득점, 7.2어시스트, 7.4리바운드, 2.2스틸이 그의 개인 성적이었다. 42승40패를 기록한 캐벌리어스는 역시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 특급 대열에 들어가기 시작

 2005-06시즌은 제임스가 마침내 특급 대열에 들어가는 시즌이었다. 
 
 제임스는 2005-06시즌에 31.4득점, 7리바운드, 6.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황제 즉위식은 연기됐다. 캐벌리어스가 플레이오프에 처음으로(제임스가 유니폼을 입은 후 처음) 진출했지만 챔피언 등극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즌에는 캐벌리어스의 선전이 인상적이었다. 
 
 2006 NBA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전, 캐벌리어스는 1라운드 또는 2라운드에서 탈락할 팀으로 평가됐다. 1라운드에서 워싱턴 위저즈에 4승2패로 승리해 2라운드에 진출한 캐벌리어스는 동부 최강이자 리그 전체에서 최고 승률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만났다.

 전문가들 중 캐벌리어스가 승리할 것이라고 간 큰 예상을 한 사람은 없었다. 피스톤스는 예상대로 1,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쾌속항진을 하는 듯했다. 캐벌리어스가 3차전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이라는 생각을 했다. 4차전에서 캐벌리어스가 이겼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두 번 떨어질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5차전에서 캐벌리어스가 승리하고 시리즈를 3승2패로 앞서 나가자 상황은 당황스럽게 됐다. 캐벌리어스가 컨퍼런스 결승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캐벌리어스는 남은 2경기를 모두 내주고 아깝게 탈락했다. 

 제임스는 시즌이 끝난 후 캐벌리어스와 연장 계약을 맺었다. 3년 계약에 4년째는 옵션이었다. 2007-08시즌을 시작으로 총 6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연장 계약이었다.



■ 가까워진 황제 즉위식

 스몰 포워드인 제임스는 몸이 빠르고 점프력이 좋아 3개 이상의 포지션을 소화해낼 수 있는 NBA 선수다. 그는 파워 포워드의 신체에 포인트 가드의 코트 전체를 보는 감각과 드리블 능력을 지녔다. 제임스는 그러나 2006-07 시즌에 수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공격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수비 능력이 공격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가 들렸다. 그는 NBA 최고의 수비팀에 선발된 적이 없었다. 또한 고교 시절부터 문제점이었던 낮은 자유투 성공률(69.8%)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 밖에 나이키와 같은 회사로부터 9천만 달러의 광고 모델 계약금을 받아내 소비자들에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높은 광고 모델료는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분담 몫이기 때문이다. 2006-07시즌에 그는 캐벌리어스의 NBA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캐벌리어스는 워싱턴 위저즈, 뉴저지 네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차례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승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4전전패로 패했다. 황제 즉위식이 또 연기된 것이다. 


   
제2의 조던이 아니라 제2의 매직?
 
 캐벌리어스 경기 전담 중계 캐스터인 조 테이트는 오하이오주 비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가 조던의 등번호였던 23번 유니폼을 입고 조던처럼 경기 시작 전에 스코어 테이블에서 송진을 공중으로 날리는 '의식'을 행하지만 그는 조던이 아니다. 제임스는 오히려 매직 존슨과 비슷한 선수다"라고 평가했다.

 매직 존슨과 비슷하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다재다능하면서도 동료를 믿는 선수라는 의미다. 제임스의 패스능력은 존슨의 그것 못지않다는 게 테이트의 설명. 제임스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테이트는 "르브론은 슛을 쏘는 것보다 패스를 잘하는 것을 더 즐긴다. 어린 선수인데도 팀 플레이가 무엇인지 아는 선수다"라고 칭찬했다. 

■ 코비 or 르브론.
 
ESPN-TV는 2008년 3월 '스포츠 센터'에서 재미난 질문을 했다. 2008년 3월 현재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굴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농구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답을 했는데 모두 코비를 선택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인 내용은 코비가 뛰어난 클러치 슈터인 점과 수비가 더 낫다는 것이었다. 2007년 NBA 챔피언 결정전 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대부분 르브론을 뽑았을 것이다. 당시 르브론은 약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NBA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끌었고 코비의 LA 레이커스는 1라운드에서 탈락한 바 있다.

 플레이오프가 열렸을 때 LA 타임스의 칼럼니스트가 썼던 글에는 "르브론과 코비는 비슷한 수준의 팀에서 뛰는데 르브론은 챔피언십 진출팀을 만들었고 코비는 그렇지 못했다. 르브론이 더 뛰어난 선수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르브론 제임스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선수였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에서 모두 뛰어나고 수비도 계속 향상하고 있었다. 코비보다 클러치 슈팅 능력과 수비가 약간 밀리기는 했지만 이는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부분이다. 르브론은 야투 성공률도 매년 향상되고 있고 특별히 가로채기와 블락샷이 좋아졌다. 자유투 성공률만 좀 더 높인다면 완벽에 가까운 선수가 될 선수다.




■ 실망스러운 두 시즌

 2007-08시즌에 캐벌리어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3승4패로 아깝게 패했다. 7차전에서 제임스는 40득점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의 승리를 이끌지 못했다. 2008-09시즌에도 캐벌리어스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시리즈에서 올랜도 매직에 패해 역시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 제임스는 MVP로 선정됐다. NBA 진출 후 첫 MVP 수상이었다. 그는 또한 올해의 수비팀에 들어가 수비 능력 향상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제임스는 NBA 신인상(2004년), MVP (2009년), 올스타 선정 5회, 득점왕(2008년), 베스트5 3회, 베스트 수비수 5인(2009년) 등 주요한 상을 모두 받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 반지뿐이다.

글: 밝은터

■ 이름: 르브론 제임스
■ 생년월일: 84년 12월30일 생
■ 포지션: 슈팅 가드
■ 키: 6피트7인치
■ 몸무게: 215파운드
■ 태생지: 오하이오주 애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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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ordan joins The Wizards
 마이클 조던(중앙)과 에이브 폴린(오른쪽) 전 위저즈 구단주.

마이클 조던의
최종 은퇴후 워싱턴 위저즈의 에이브 폴린(2009 11월 작고) 구단주는 조던을 구단 사장으로 두질 않았다. 2003 57일 조던은 위저즈를 떠났다. 당시 조던이 해고된 일은 충격적이었다. 조던이 위저즈에 들어와서 이 구단은 흑자경영 구단이 됐는데 공신을 해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농구의 황제가 위저즈에서 선수로 뛰기 전까지 이 구단은 4천만 달러의 적자를 내는 구단이었다. 조던의 존재 하나로 위저즈 구단은 3천만 달러의 흑자를 보게 됐다. 사람들은 폴린 구단주가 냉정하게 조던을 내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폴린의 결정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조던은 위저즈 구단의 사장 및 단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직접 코트에서 뛰는 것 외에는 경영자로서 뛰어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콰미 브라운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지명한 것과 제리 스택하우스를 영입하고 리처드 해밀턴을 디트로이트로 보낸 것 등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폴린이 결정적으로 조던을 해고한 이유는 그가 주로 시카고에서 머물면서 위성 경영을 한 것에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 상주하지 않고 시카고에서 전화로 구단을 경영하는 것은 폴린 구단주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폴린은 조던이 선수로서 은퇴한 후에 경영자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폴린은 어니 그런펠드를 사장으로 고용했고 이후 위저즈는 4년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젊고 화려한 팀을 만들 수 있었다.

조던은 루키의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조던은 경영자로서 프런트 오피스 동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선수들과도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최고의 선수가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고된 후 조던은 그야말로 실업자신세가 됐다. 물론 계속 이어지는 광고 모델 활동은 했지만 농구에서 잠시 떨어져 있었다.

Charlotte Bobcats vs Boston Celtics
 밥캐츠의 주주인 조던이 레이몬드 펠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던 중 샬럿 밥캐츠 구단에서 주주가 됨과 동시에 구단 경영진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그는 2006 615일 밥캐츠 구단의 주주로서 농구계로 돌아왔다. 주주가 되면서 그는 자신이 마케팅에 활용되기를 원치 않았다. 구단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던은 대신 밥캐츠 구단의 매입에 관심을 보였다. 이 구단의 흑인 구단주인 로버트 존슨은 구단 매각을 선언했고 조던은 투자그룹을 만들어 구단 매입에 관심을 표명했다. 구단 매각/매입은 2009 12월 현재 진행 중이다.

조던은 이 구단의 주주가 되고 구단 경영에 참여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지난 2007 313일 버니 비커스태프 감독을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샘 빈센트 신임 감독을 영입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빈센트 감독도 역시 실패작이었다. 2008 4월 빈센트 감독은 해고됐고 밥캐츠는 전설적인 감독인 래리 브라운을 영입했다. 브라운 감독은 기대만큼 해줬다. 그는 약팀을 강하게 만드는 데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물론 뉴욕 닉스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조던은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애덤 모리슨을 전체 3번으로 지명해 보는 눈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모리슨은 곤자가대학 시절에는 대단한 슈터였지만 프로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던은 그러나 2008년 드래프트에서는 D.J. 어거스틴을 지명해 옳은 판단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라자 벨, 보리스 디아우를 영입해 브라운 감독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



밥캐츠의 주주가 된 얼마 후인 2006 1229일 조던은 17년 동안 살았던 아내 후아니타와 이혼을 하게 됐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후아니타는 무려 16,800만 달러를 위자료로 받았다. 이는 유명인과의 이혼에서 받게 되는 최고액수였다. 이전까지 최고액수는 닐 다이아몬드(가수)가 마샤 머피에게 준 15천만 달러였다. 스티븐 스필버그(영화감독)도 이혼하면서 전 아내 에이미 어빙에게 무려 1억 달러를 위자료로 지불했다. 

조던은 2009 46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선수로 선정됐다.

조던은 남은 생애는 구단주 조던의 삶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연 밥캐츠의 구단주가 될 것인가. 그는 경영자로서 과연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팬들의 관심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다. [연재 끝]

밝은터 코멘트: 마이클 조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댓글을 달아주시고 격려를 해주시고 추천 버튼을 눌러주신 네티즌 동료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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