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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는 기억을 남긴다. 기억은 기록이 된다. 기록은 역사가 된다. Since 2009.04.04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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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스포츠 스타 열전'에 해당되는 글 60

  1. 2011/02/01 [스타 열전] 잭 니클러스
  2. 2011/01/31 [스타 열전] 닥 리버스
  3. 2011/01/29 [스타 열전] 라인 샌드버그
  4. 2011/01/28 [스타 열전] 아니카 소렌스탐
  5. 2011/01/28 [스타 열전] 아놀드 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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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잭 니클러스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1/02/01 19:12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잭 니클러스가 '전미 주니어' 경기에 처음으로 출전한 것은 13세 때였다. 그는 '오하이오주 주니어  경기'와 '콜롬버스 주니어 매치 플레이'에서 우승했다. 13세의 니클러스가 우리 나라로 말하면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놀라운 기록을 냈던 것이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소년 시절의 한 살 차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다. 그런 그가 18세의 선수들을 누르고 그런 결과를 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지방에서 개최한 작은 규모의 주니어 선수권이었지만 13세로 처음 우승을 했다. 그가 51세의 나이에 '전미 시니어 오픈'에서 우승을 했으니 그의 우승 스토리는 거의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3세의 소년때부터 51세의 시니어에 이르기까지  니클러스는 항상 승리의 골프를 목표로 플레이하였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그가 승리를 거듭한 골프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가? 한마디로 말하면 정신과 기술 그리고 신체 모두가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인도어'보다는 '아웃도어',  '인공물'보다는 '자연물'을 좋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포츠가 상대편과의 관계에 따라 플레이가 좌우되는 것과는 달리 골프는 자기 혼자서 이끌어 나가는 스포츠이기에 나이 어린 나에게 크게 감동을 주었다. 골프 코스도 여간 매력적인게 아니었다. 골프장은 정작 플레이를 하지 않더라도 만족감에 젖게하는 그윽한 장소였다."

 승부에서는 상대편이 필요하다. 패배하는 쪽이 있으면 승리하는 쪽이 생긴다. 그러나 골프장이 소년 니클러스에게는 승부를 다투는 필드라 하기보다는 자기 개발의 장소였다.

  또한 자연을 관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니클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 속에 몸을 두는 것만으로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나의 골프는 그처럼 단순하게 스타트했다. 이윽고 기술이 향상되면서 여러 가지 것에 흥미를 갖게되었고, 그것이 다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골프 코스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샷의 타입이나 질을 높이고, 하나의 골퍼를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샷으로 이어지게 하는 코스의 풀들이나 나무, 물, 모래, 지형과 따의 성질등을 위해서 나 자신을 코스 설계자로 입장을 바꾸어 그 속셈이 무엇인지를 몰두하며 파악하려 하였다.

 설계의 의도를 추리하면서 왜 그런 의도를 가져야 하였는지의 필연성을 상상했다. 또는 특수성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그와같은 노력어린 관찰은 당연히 나의 샷 메이킹 작전을 향상시켜 준 것이다. 그것이 스코어를 잘 챙기는 결과가 되었고, 전술의 무기로도 볼 수 있는 울트라 코스 분석요령을 안겨주었다. 나의 골프는 더욱 알차게 다져진 것이다. 골프의 챔피언십이 다른 게임의 그것과 자못 다른 것은 상대편과 승부를 가리며 싸우기 전에 반드시 해야할 것, 즉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꼽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골프 자질을 높이고, 정신이나 기술, 신체도 함께 수준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소년 잭 니클러스는 줄기차게 그것을 이루면서 5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잊지않고 있는 것이다. 골프의 챔피온십이 단지 상대편과의 승부를 겨루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처름 수명이 긴 경기생활을 지속시킬 수 없을 것이다. 13세의 소년에게도 자신을 개발할 수 있는 요령이 있었다. 지금도 나름의 요령을 갖고 있다."

  니클러스가 힘을 쏟고 있는 테마는 연령과 더불어 변화하는 정신, 기술, 신체로 하여금 연령에 맞추어 최고의 질을 유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잭 윌리엄 니클러스는 오하이오주 콜롬버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약국을 경영하였으므로 잭은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골프를 시작한 것은 10세 때였는데 부친이 소속돼있는 사이오트CC(전미 오픈도 개최한바 있는 명문)에서 그해부터 클럽프로로 맞아들인 잭 그라우트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그후 두사람의 스승과 제자관계는 그라우트가 세상을 뜰때까지 40년 가까이나 이어졌다.

  흔히 "맨 처음의 볼 치는 모양을 보고, 그 골퍼의 장래가 짐작된다."고 한다.

  골퍼로서의 자질이 최초의 샷에서 표출된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50명의 학습생 중에서 몇 사람은 곧 떠나갔지만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도 골프에 대한 마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잭보다 재주있게 볼을 치는 소년도 더러는 있었지만 잭만큼 열심이고, 골프를 좋아하는 소년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가르지는 방식이 너무 우악하다며 아이들을 그대로 데리고 돌아가는 부모도 있었는데 잭의 부친은 말없이 내가 가르치는대로 맡겼었다. 선생인 나에게 아들을 맡긴 이상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해달라고 하며 흐뭇한 웃음으로 지켜 보았던 것이다."



 그라우트는 자서전 속에서 그렇게 썼다. 여하간에 니클러스의 "맨 처음 쳐보인 모습"이 어떤 동작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10세 소년 시절부터 50세가 될 때까지 그라우트는 니클러스의 스윙을 한결같이 살피며 체크해 준 것이다.

  스윙의 완벽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19세때 '전미 아마'에서 처음 우승을 했고, 영국과 미국의 아마추어 대항전인 '워커 컵'에서는 미국팀의 대표로 뽑혀 처음으로 스코틀랜드를 건너갔다.

  시합은 '전영 오픈'경기를 개최하는 코스로 잘 알려져 있는 뮤어필드에서 거행됐는데 싱글매치와 포섬에서도 이기고, 아메리칸 팀이 승리를(9대3) 거두는데 공헌했다.

  그 시합을 구경한 영국의 이름 높은 골프 평론가 워드 토머스는 니클러스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만전의 준비가 될 때까지는 그리고 스탠스와 그립이 허점없이 조정될 때 까지는 또한 마지막 결단이 잡힐때까지는 절대 볼을 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된 다음에 비로써 강력한 스윙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동작은 확실히 게르만 민족의 인내력을 엿보게 하는 것이 있다."

 니클러스의 조상은 북부 독일 출신이다. 그가 항상 최고의 것을 추구하거나 완전한 것을 찾는 것은 그 혈통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완전함을 추구하며 그것이 소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관해 자세히 알고있는 미국의 골프 평론가 켄 보덴은 "잭은 언제나 100%로 만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맨처음의 샷 한번"이 어떤 모습이었든간에 그의 자세가 바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의 본보기였던 모양이다.
 
  '골든 베어'로 불렸던 그는 PGA 투어에서 24년 동안 활약하면서 18차례 메이저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골프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힐 정도로 위대한 성적을 냈다. 그는 PGA 투어에서 73회, 챔피언스 투어에서 10차례 기타 투어에서 32회 챔피언에 올라 프로로서 총 115차례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1967년, 1972년, 73년, 75년, 76년에 그는 PGA 올해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Golf Herald=ICCsports.com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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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닥 리버스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1/01/31 20:27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2008 북미 프로농구(NBA) 챔피언 결정전 당시 '어떤 감독이 더 뛰어났나'라는 질문을 했다면 대부분은 보스턴 셀틱스의 닥 리버스 감독을 거론했을 것이다. 리버스 감독은 2008 시즌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지도자였다. 반면 그의 맞대결 상대는 NBA 챔피언 반지 9개를 받은 명장이었다. 리버스는 2008년 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잭슨에 분명 승리했다. 



필 잭슨 보다 낫다?

 레이커스 필 잭슨 감독과 비교하면 당시 시리즈에서만큼은 리버스가 앞섰다고 할 수 있다. 크게 앞섰다. 리버스는 셀틱스 선수들이 능력을 최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벤치 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한 데에는 리버스 감독의 지도력이 크게 한몫했다는 분석이 있었다. 셀틱스의 스타 선수들은 팀 플레이로 일관했는데 이 역시 리버스 감독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셀틱스 선수들이 오랜시간 열심히 현명하게 경기를 운영한 것도 리버스 감독의 공이었다. 잭슨 감독이 못했다기보다는 리버스 감독이 너무나 잘했다고 할 수 있다.

선수 시절부터 강한 승부욕

 리버스 감독은 애틀랜타 혹스 시절 전성기를 보냈다. 혹스에서 포인트 가드로 뛰었던 시절 승부욕이 얼마나 강했는지 동료 선수가 잘못하면 여과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출했다. 리버스는 선수였지만 마치 지도자 같았다고 혹스의 동료였던 도미닉 윌킨스는 말했다. 윌킨스는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트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셀틱스에 빅3가 있기 때문에 우승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감독의 노력 없이 우승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좋은 선수들이 많아도 감독의 능력이 없으면 우승할 수 없다."라며 리버스가 좋은 선수들을 데리고 좋은 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레이커스의 수석코치인 짐 클레몬스도 리버스 감독을 칭찬했다. 그는 "우리는 B+의 경기를 했다. 그러나 셀틱스는 A+ 수준의 경기를 했다. NBA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하려면 A 경기를 해야 한다."라며 적장을 추켜세웠다.
  
필 잭슨 동기유발 방법 활용

 필 잭슨 감독은 선수들에게 동기유발을 잘하는 데 당시 시리즈에서는 리버스가 '젠 매스터'에 비해 돋보였다. 레이 앨런은 플레이오프 내내 부진하다가 당시 시리즈에서 맹활약했는데 이는 리버스 감독의 노력 덕분이었다. 리버스 감독은 선수들에게 동기유발을 하도록 하고자 각종 일화, 이야기, 인용구 등을 복사해 선수들에게 나눠줬다. 이는 잭슨 감독이 잘했던 방법이다.

 리버스는 동시에 선수들에게 느낀 점을 여과 없이 말했다. 앨런, 케빈 가넷, 폴 피어스와 같은 스타 선수들에게 솔직하고 강하게 말했다. 앨런은 "그의 지도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른 감독들이 하지 않는 솔직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선수들을 감동시켰다."라고 말했다. 가넷도 "리버스 감독은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힘이 있다. 그의 말에는 희망이 있다."라고 말했다.



3쿼터 사나이 

 리버스는 당시 '3쿼터의 사나이'라고 불렸다. 셀틱스는 당시 시리즈 5차전까지 레이커스와의 3쿼터 싸움에서 43점 차로 승리했다. 3쿼터만 되면 셀틱스는 다른 팀이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작전 수정과 동기유발 연설을 할 때 리버스가 훨씬 잘했기 때문이었다. 셀틱스가 4차전에서 24점 차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리버스의 '해프타임 설교' 덕분이었다고 셀틱스 선수들은 입을 모았다. 리버스가 잭슨을 앞섰다는 근거는 바로 3쿼터의 결과에서 나왔다.

"닥" 리버스

 리버스의 본명은 글렌 리버스다. 그가 닥(Doc)이라는 별명을 얻은 시기는 70년대 후반 고등학교에 다녔을 시절이었다. 당시 마켓대의 감독이었던 릭 매저러스는 줄리어스 어빙이라는 NBA 스타의 별명인 "닥터 J"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리버스에게 이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80년대와 90년대에 애틀랜타 혹스, LA 클리퍼스, 뉴욕 닉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뛰었던 리버스는 괜찮은 포인트 가드였다. 199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리버스는 이후 코치 수업을 받았고 1999년 올랜도 매직의 감독이 됐다. 성적은 좋았다. 거의 매년 5할 승률을 유지했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매직의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3년 연속 1라운드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리버스는 1승10패로 2003-04시즌을 시작한 후 해고됐다. 해고된 얼마 후 보스턴 셀틱스의 감독이 된 리버스는 첫 시즌에 45승37패의 좋은 성적을 내 뜨는 젊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005-06시즌과 2006-07시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후 자리가 위태했다. 대니 에인지 셀틱스 단장은 그러나 리버스 감독을 여전히 신뢰했고 '빅3'를 결성한 후 리버스는 66승16패의 놀라운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우승 아깝게 놓쳐

리버스는 2008-09시즌도 62승을 기록하며 셀틱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지만 2라운드에서 매직에 3승4패로 역전패 당하고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셀틱스는 2009-10시즌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나갔지만 마이애미 히트, 올랜도 매직,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차례로 누르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해 필 잭슨이 이끄는 레이커스를 만났다. 셀틱스는 3승2패로 앞섰지만 남은 2경기를 모두 내주고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리버스는 2010-11시즌를 앞두고 팀을 떠나려고 했으나 계약을 이행하기로 했다.

[닥 리버스 프로필]
▷포지션: 포인트 가드
▷키/몸무게: 6피트4인치(193cm)/185파운드(84kg)
▷생년월일: 1961년 10월13일 (46세)
▷출생지: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신교: 마켓대
▷선수 시절 소속팀
애틀랜타 혹스(1983–1991)
LA 클리퍼스 (1991–1992)
뉴욕 닉스 (1992–1994)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4–1996)
▷수상 경력:
NBA 올스타 1회(1988)
2000년 올해의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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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라인 샌드버그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1/01/29 08:00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시카고 컵스 팬들의 ‘달링’이었던 라인 샌드버그는 80년대 최고의 2루수였다. 샌드버그는 200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9년 연속 올스타전 주전 2루수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샌드버그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계속 낙방하다가 2005년 1월 투표에서 마침내 76.2%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전당에 들어갔다. 



고교시절 풋볼 스타 

 샌드버그는 고교시절 유명한 쿼터백이었다. 워싱턴주 스포케인에서 고교 재학중이었던 샌드버그는 올-아메리카 쿼터백으로 뽑히며 워싱턴 스테이트 진학을 계획했던 풋볼 스타 후보생이었다. 그는 그러나 야구 선수로도 유명했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지명된 후 결국 야구를 선택했다.

컵스로 트레이드 

 마이너리그에서 3년을 보내고 메이저리그로 승격된 샌드버그는 한 시즌을 뛴 후 컵스로 트레이드됐다. 이는 필리스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로 평가됐다. 컵스 유니폼을 입은 샌드버그는 ‘바람의 도시’에서 맞은 3번째 시즌에 3할1푼4리의 타율, 홈런 19개, 84타점, 도루 37개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됐다. 

드문 2루수 파워히터 

 홈런 타자가 아니었던 샌드버그는 당시 컵스 감독이었던 짐 프레이의 충고를 듣고 당시에는 드문 2루수 파워 히터로 탈바꿈했다. 컵스 감독은 샌드버그에게 “볼 카운트가 노스트라이크2볼이거나 1스트라이크3볼이면 큰 거 한 방을 노려라”고 충고했다. 샌드버그의 홈런수는 크게 늘어났고 89년에는 30개, 90년에는 40개의 홈런포를 쏘아올려 2루수는 교타자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샌드버그는 파워 히터이면서 도루 숫자도 많았고 수비가 좋은 선수였다. 그는 84년부터 93년까지 9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받았다. 

명예의 전당 투표의 아픔 

 그럼에도 그는 명예의 전당 첫 투표와 두 번째 투표에서 미끄러졌다. 샌드버그는 그때마다 “나는 명예의 전당에 갈 자격이 없다”며 겸손하게 말했는데 이 같은 자세가 투표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세 번째 도전에서 득표율 76.2%를 기록했다.

Chicago: Wrigley Field - Concourse - Banners
Chicago: Wrigley Field - Concourse - Banners by wally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통산 성적 

 샌드버그는 통산 2,386개의 안타, 홈런 282개, 평균 타율 2할8푼5리를 기록했다. 1997년 컵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는 줄곧 한 구단에서만 있었다. 필리스에서 잠시 뛴 후 컵스로 트레이드돼 줄곧 한 팀에만 있었던 것이다. 컵스에서 그는 올스타 선정 10회, 골드글러브 9회 수상, 실버슬러거 7회 수상, 1984년 내셔널리그 MVP, 1990년 홈런더비 챔피언에 올랐고 그의 23번 유니폼은 컵스에 의해 2005년 영구결번됐다. [밝은터]

[라인 샌드버그 프로필 (baseball-reference.com)]

Ryne Dee Sandberg (Ryno)

Positions: Second Baseman and Third Baseman
Bats: Right, Throws: Right
Height: 6' 1", Weight: 175 lb.

Born: September 18, 1959 in Spokane, WA (Age 51)
High School: North Central (Spokane, WA)
Drafted by the Philadelphia Phillies in the 20th round of the 1978 amateur draft.
Signed June 15, 1978. (All Transactions)
Debut: September 2, 1981
Teams (by GP): Cubs/Phillies 1981-1997
Agents: Jim Turner,Richie Bry [*]
Final Game: September 28, 1997
Inducted into the Hall of Fame by BBWAA as Player in 2005 (393/516 ballots).
Relatives: Uncle of Jared Sandberg
    About biographical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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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아니카 소렌스탐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1/01/28 19:19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아니카 소렌스탐이 처음 골프와 인연을 맺기 시작 한 것은 12세 때이다. 고향 스웨덴 스톡홀름의 아름다운 대자연을 향해 볼을 날리던 그녀는 처음엔 단순히 골프를 치는 것이 즐거웠다. 아마추어 시절 화려한 플레이어로 스웨덴 골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1987년에서 92년까지 스웨덴 국가 대표 선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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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대 입학

 소렌스탐은 1992년에는 세계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활약했으며 1992년 US여자 아마추어 대회와 US여자 오픈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애리조나 대학 시절 그는 1991년 올해의 선수상을, 1992년에는 소속 학교를 NCAA 챔피언십 준우승으로 이끄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WPG 유럽 투어에서 활동한 소렌스탐은 1993년 록키상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스웨덴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칭송받는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3년 LPGA 입문

  1993년 10월 미 LPGA에 입문한 소렌스탐은 이듬해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여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그는 1995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 낸시 로페즈 이후 처음으로 올해의 신인상과 올해의 선수상을 연이어 수상한 영예를 안았다.

  그는 1996년 70.47로 시즌 최저타를 기록하면서 베어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1997년에는 올해의 선수상을 다시 수상, 골프 사상 3년내 두 번 수상하는 기록을 남긴다.

가장 위대한 여자 골퍼

 소렌스탐은 2008년 은퇴할 때까지 LPGA 투어 72회 우승, 유럽투어 17회 우승, LPGA일본 투어 2회 우승, ALPGA 4회 우승 기타 3회 우승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프로에 입문해서 우승한 횟수는 총 93회다. 이 중 메이저대회 우승은 총 10회다. 1995년 US 오픈을 시작으로 2006년 US 오픈까지 총 10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0개 중 무려 3차례가 한국 선수와의 접전 끝에 따낸 것이었다.

 그는 2003년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박지은과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고 2003년 브리티시 오픈에서는 박세리를 1타차로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또한 2004년에는 안시현에 3타차로 승리해고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8차례나 LPG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소렌스탐은 선수 생활 중에 무려 2천2백만 달러를 상금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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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한국 선수에 대해 

아니카는 박세리와 좋은 관계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방문을 했을 당시 "90년대에 나와 박세리, 카리 웹이 여자 골프에서 중심이었다. 박세리는 정말 좋은 선수였다"고 말했다. 아니카는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37세에 왜 은퇴했을까?

37세에 은퇴했을 때 그는 여전히 세계 톱클래스 골퍼였다. 그는 왜 은퇴를 선택했을까. 소렌스탐은 "다른 중요한 일들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다른 일 중의 하나는 바로 가정이다. 가족을 위해 음식하기를 즐기는 소렌스탐은 재혼을 앞두고 있었고 재혼 생활에서는 새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던 것이다. 골프에만 열중하느라 첫 번째 남편과 헤어졌던 그는 가정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아니카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해서 사업을 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하고자 했다. [ICC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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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열전] 아놀드 파머

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 2011/01/28 19:13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골프가 볼을 갖고 하는 다른 게임하고 크게 다른점을 하나 든다면 플레이어와 관객이 함께 필드를 걸어가는 것이다. 골프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성이 아놀드 파머의 응원 부대를 만들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플레이할 때의 파머는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는데 페어웨이를 걸어갈 때의 그 꾸밈없는 표정은 관중에게 '우리들의 부대장'이란 친근감을 주었다.

 눈을 마주치기만해도 관중들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소년들을 소중히 대했다. 그 상징적인 것으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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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더버드 클래식 경기 때 13세의 소년이 그 아버지와 함께 파머의 뒤를 쫓아가며 구경을 했다. 12번 홀에 왔을 때 소년은 앞질러가서 14번 홀에서 파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장소에서 파머의 플레이하는 것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 페어웨이 한쪽에 서있는 소년 쪽으로 걸어온 파머가 말을 걸었다.

  "13번 홀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그사이 어디에 가 있었지?"

  파머는 그 정도로 자상하고 세심했다. 또 어느 시합에선  그린 위에서 마크를 하고 뒤로 걸어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갔는데 그러다가 청각장애인인 12세 소년하고 부딪쳤다. 파머는 순간 그 소년이 장애아라는 것을 알고 상대편 선수가 퍼팅을 끝내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포근히 안고 있었다.

  그 후 소년은 누구에게나 손 짓으로 얘기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아놀드 파머는 내 친구야."

  그 때문에 18번 홀을 홀아웃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파머의 둘레에는 언제나 소년 팬들이 겹으로 둘러싸여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은 소년들의 보물이 되었고, 파머가 경기에 나갔을 때는 그 보물을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물론 응원을 한 것은 소년들만이 아니다.  파머가 퍼팅이 빗나가 명중 시키기 못하기라도 하면 미국 각지에서 팬들이 나름대로 의견이나 어드바이스를 보내왔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나는 당신의 열광적인 팬인데 봅 호프 클래식의 마지막 라운드 17번 그린에서 당신이 퍼팅했을 때  퍼터 헤드 끝이 살짝 움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1965년 선더버드 경기 때도 그랬었다. 그래서 버디 퍼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또 어떤 편지에는, "클리블랜드 경기때 꼭 한마디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짜리 학생이 수학 공부를 하다가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의 공식을 일러주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서 일러주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실은 퍼팅할 때 당신의 퍼터가 약간 흔들리는 듯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일러주고 싶은 말은 이것 뿐으로 무례한 이 말을 아무쪼록 이해하고 참고로 삼아주기 간절히 바란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 중에는 퍼팅의 명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자기 집 거실에서 하는 연습방법을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티팩을 거꾸로 세워놓고, 그것을 표적삼아 그 표적에서부터 흰 실을 깔아 티팩 라인으로하여 몇 m쯤 떨어진 위치에서 볼을 굴려보내 그 티팩을 쓰러뜨리는 연습을 하루 일과처럼 지키면서부터 퍼팅이 좋아졌다. 컨디션이 좋을때는 18홀을 72, 평균으로도 76-78이다. 그리고 끝으로 당신이 앞으로도 계속 위대한 골퍼로 활약할 것을 바라고 있으므로 도움이 될까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아무쪼록 더욱 힘내시길 빌어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0년대의 파머에게는 그와같은 팬레터가 끊임없이 보내져 왔다. 그 중에는 헐뜯는 내용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친애롭고 정감어린 것들 뿐이었다.

  파머와 함께 페어웨이를 걸었던 감격을 전하고자 하는 한 마음 뿐인 것이다. 그와 같은 파머도 70년대에 접어들고는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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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의 봅 호프 클래식이 그의 투어에서 마지막 우승이 되었고, 언론에서는 "그의 은퇴시기가 찾아왔다"고 까지 보도했다.

  "신데렐라의 꿈이 끝나가고, 그것을 알리는 종소리의 밤이 다가왔다."고 글을 쓴 기자도 있었다. 그러나 파머나 팬들이나 그런것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시니어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1929년 태생의 파머가 시니어의 시합에 나간 것은 80년의 '전미프로 시니어'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 경기에서 거뜬히 우승했다. 레귤러 투어에서 '시들어진 영웅'만을 볼 수밖에 없었던 팬들이 마침내 활기를 되찾았다. 80년대 초, 1, 2년 사이에 몇 시합에 불과했던 시니어 투어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84년에는 24개 대회, 상금 총액이 5백만 달러, 85년에는 27개 대회로 상금도 6백만 달러가 되었다.

   그리고 70년대까지는 55세 이상이 참가 자격이었는데 USGA 주최의 '전미시니어 오픈'도 80년대에 들어서서는 '50세 이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파머에게 출전 자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열망에 부응하여 81년의 '전미시니어 오픈'에서 우승, 그후 80년에 한 차례 우승, 84년에는 다시 '전미프로 시니어'에서 우승을 하였고, 그 외에도 두 번 우승이 있었다. 시니어 투어의 특색중 하나는 '프로 . 아마'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프로에 4명의 아마추어가 함께 라운드를 한다. 결승 라운드는 프로만 하지만 전반전에서는 '프로 . 아마'의 성적도 토너먼트 스코어로 채용된다. 아마추어는 시합에서 프로의 묘기를 실제로 구경하며 플레이를 함께한다.

  그것 또한 다른 볼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시합 방법이다. 파머가 그 메인 호스트가 된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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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골프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골프는 바로 내 인생 그것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게임에 미친 공헌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게임이 내게 안겨준 힘과 꿈이었다. 내가 아무리 힘을 다해도 그 게임에서 받은 힘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것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나를 칭찬해 주었지만 그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골프를 칭찬한 것이다."

  파머는 언제나 골프를 감사하면서  플레이를 하였다.

   파머는 PGA 투어에서 총 62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시니어 투어에서는 10차례 챔피언이 됐다. 메이저 대회에서는 매스터스에서만 4회 우승, US 오픈 1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총 7차례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골프 헤럴드=ICCsports.com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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