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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캘리포니아(5)] 자동차 혁명의 원천지

연재/캘리포니아 | 2009/10/04 22:36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주 중 가장 중요한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한국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세계 대중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캘리포니아를 모른 채 이곳에서 2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21 캘리포니아]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것인데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군요.  20/21은 20세기와 21세기를 의미합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하는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지금부터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밝은터]

1930년대 LA시 전경


1890년대 남 캘리포니아(이하 남가주)에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있었다. LA 지역에 오일이 발견된 것. 이는 곧바로 오일 붐(Oil Boom)으로 이어졌다. 당시 LA 길거리는 오일을 퍼내기 위한 기중기(Derrick)와 유정(Oil well)으로 가득했다고 역사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오일이 터져나오면서 LA 경제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LA는 당시 전 세계 오일 생산량의 5%를 생산할 정도의 대량의 오일 생산으로 활력이 넘쳤다.

오일이 발견되면서
LA는 많은 졸부를 탄생시켰다. 알폰소 벨이라는 가난한 농부는 당시 200에이커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오일이 뿜어나오면서 땅을 빌려주는 대가로 한 달에 10만 달러까지 소득을 올릴 정도였다. 20세기 초반의 10만 달러는 지금의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다. 벨은 오일 붐 덕분에 번 돈을 가지고 베벌리 힐스로 이동, 벨 에어(Bel-Air)를 개발해 추가로 엄청난 부를 챙겼다.


이러한 오일 붐과 발맞춰 남가주에는 자동차 붐이 일기 시작했다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이 주요 교통 수단이었으나 남가주에는 자가용이 더 인기를 끌었다. 오일 붐과 함께 이 지역의 독특한 상황이 자가용 붐을 이끌었다. 헌팅턴 시스템에서 운영하던 노면 전차(Streetcar)는 이들의 독점 운영으로 시민의 원성을 샀다. 전차의 운영이 매끄럽지 못하자 LA 시민은 불만이 가득했고 이런 상황에서 자가용차가 급부상했다.


시민은 대중 교통을 거부한 채 자가용차가 쉽게 다닐 수 있는 아스팔트 도로 건설을 지지했다
. 자가용차의 등장과 아스팔트 도로의 개발은 남가주민들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중앙에 집중됐던 거주지역이 점차 외곽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사업체와 공장들도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일 붐이 일고 자동차가 개발되고 아스팔트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가주는 그야말로 자동차의 메카가 됐다. 이는 20세기에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산업의 부흥
, 할리우드의 번영 등으로 1920년부터 30년까지 10년 동안 LA카운티의 인구는 100만에서 300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자동차수는 80만 대가 넘어 LA 지역에서 3명당 1명은 자동차를 소유한 셈이 됐다. 1930년대 한국과 비교한다면 엄청나게 빠른 문명의 전파라고 할 수 있다.



남가주는 자연스럽게 자동차 관련 산업
, 환경,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 됐다. 1932 LA 올림픽도 자동차의 발달로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경제 대공황으로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비해 출전국가 수가 크게 줄었음에도 LA 올림픽은 당시로는 큰 액수인 100만 달러의 순수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37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미국은 금메달 41개로 12개의 이탈리아에 크게 앞섰다. 1932년 올림픽도 그렇고 1984 LA 올림픽도 반쪽짜리 대회였지만 대회조직위의 수입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LA 주민들은 점점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시 중심부에 살 이유가 없었다. 이로 인해 건축붐이 일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LA는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도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분위기는 쇼핑 문화도 바꿨다
. 수퍼마켓이라는 것이 생겨 한곳에서 한거번에 장을 보는 게 문화가 됐고 주유소가 성업했고 차 탄 상태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드라이브 스루(Drive Thru)가 생겼다. 이는 남가주에서 패스트푸드점이 성장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대공황 때도 자동차 시장은 상승세였다
. 그러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부작용도 있었다. 환경문제(스모그)가 심각했고 개인주의 성향이 점점 심화했다. 개솔린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 것은 중동이 득세하는 주요한 이유가 됐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후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의 겨울 기온이
2030년까지 크게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공해문제에 기인한다. 가뭄, 이상기온, 환경문제는 곧 경제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미국과 캘리포니아의 경제 부흥을 이끈 분야가 자동차라면 경제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자동차가 될수도 있다
.


 [1920년대의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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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를 모른 채 이곳에서 2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21 캘리포니아]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것인데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군요.

20/21은 20세기와 21세기를 의미합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하는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지금부터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밝은터]



캘리포니아에도 한때 사회주의(Socialism) 바람이 불었을 때가 있었다. 21세기 현재 LA 한인타운을 관통하는 윌셔길(Wilshire Boulevard)19세기 후반 사회주의자였던 H. 게일로드 윌셔에 의해 개발된 LA의 샹젤리제였다.

신시내티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받은 부를 갖고 여러 분야에 투자를 해 거부가 된 H. 게일로드 윌셔는 사회주의자였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는 윌셔 매거진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이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잡지였다.

윌셔길과 윌셔 매거진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주 활동무대가 됐다.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노동자들의 근무시간과 임금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윌셔의 정신을 이어받은 좁 해리슨도 노동자 권익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LA 시장 선거에 나섰는데 약 800표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역시 사회주의자이자 감리교 목사였던 J. 스티트 윌슨은 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득표율 40%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역시 보수진영을 넘어서지 못했다. 1912년 당시 보수진영의 조셉 놀랜드는 54%의 득표율로 주지사로 당선됐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 집중했다.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만 근무하고 최저임금을 보장받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사회주의운동이 캘리포니아에서 활발했던 이유는 철도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들이 돈으로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캘리포니아 정치, 경제,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위기를 느낀 젊은 지성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들 젊은 지성인들은 주로 백인이었고 중산층 프로테스탄트였다. 캘리포니아 사회주의자들은 온건파였다.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 더 사회주의자처럼 발언을 하고 다닐 정도였다.

The Achievers Segment 1by drivetv

20세기 초반에 캘리포니아에 불어닥친 사회주의는 거의 홍익인간주의적인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활동에 환호했지만 자본가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본의 쏠림 현상이 강하고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회주의자들로 인해 캘리포니아는 노동조합이 조직적으로 잘 운영되는 지역이었다.

그들의 사회주의 활동은 그러나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역사에서 감춰지기 시작했다. 세계 전쟁이었기에 미국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간에도 견해 차가 심한 것이 사회주의운동이 사라지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사회주의는 세계 1차 대전, 세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점점 더 미국 및 캘리포니아에서 힘을 얻지 못했다. 공산주의 국가와의 대치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됐다.

그들의 인식 속에 사회주의는 미국과 전 세계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은 세계 민주 질서를 확립하는 일종의 경찰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더욱 강력히 몰아세웠다. 이는 미국 내에서 사회주의가 자리잡지 못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내 보수파의 입김과 세계 정세로 인해 사회주의는 난도질 당했다.

21세기 들어서도 사회주의는 부정적인 단어로 남아 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료보험개혁을 실시하려고 하자 일부 극보수파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개혁안 통과를 강력히 반대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미지는 심지어 노동계층에게도 잘못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준다.

현재 미국 보수파 정치인들은 진보세력이 개혁을 추진할 때 사회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특히 논쟁에서 도저히 승리하기 어려울 때 보수파 정치인들이 쓰는 전략은 당신은 사회주의자다’ ‘당신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다.

두 가지 말만 날려 민심을 흔들어 놓는다면 이 말을 들은 장본인이 그 어떤 말을 해도 국민에게 먹히지 않는다. 건전한 토론이 아닌 역사의 쓴물을 국민에게 뿌려 진흙탕 논쟁으로 흐리게 하는 작전인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사회주의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약자를 보호하려는 정신은 20세기에 미국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노동운동, 페미니즘, 인종 운동 등은 사회주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캘리포니아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주의 정신이 미국에서 자리잡도록 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점은 괄목할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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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를 모른 채 이곳에서 2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21 캘리포니아]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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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서 밝은터]




1920년대만 해도 영화제작사에 제작비를 빌려주는 은행은 거의 없었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미국 동부 은행가들은 영화제작에 융자를 해주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은행’(이후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됨)의 행장인 A.H. 지아니니라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영화사에 돈을 빌려줬다.

이는 캘리포니아에서 영화산업이 발전한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뛰어나도 돈이 있어야 제작이 가능한데 지아니니는 그런 면에서 앞서 나가는 물주였다.

남 캘리포니아는 은행 융자의 용이성 외에도 언론 환경이 좋았다. 동부 언론은 영화에 대해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았지만 남캘리포니아의 언론은 영화 및 영화배우 소개에 열을 올렸다. 관객이 관심을 둘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할리우드가 태동하고 번영한 다른 이유는 자유와 신비스러운 이미지다. 미국의 동부와 남부는 질서와 전통을 중시했던 지역인 반면 로스엔젤레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권장하고 신비스러움이 보태어져 영화제작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남 캘리포니아는 그들이 상상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윌리엄 드밀이라는 뉴욕 브로드웨이 제작자는 위계질서와 전통이 중시되는 동부를 떠나 할리우드로 이동하면서 자신이 젊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젊음을 상징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할리우드에서는 쉽게 느껴졌고 이는 소위 말해 그의 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런던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은 남 캘리포니아에 대해 미래를 위한 땅이라고 평가했다.

Charlie Chaplin Biography


기존 질서와 전통에 염증을 느꼈던 젊은이들은 빨리 성공을 이룰 수 있는 할리우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 끼 많은 젊은이들이 할리우드로 몰려들자 영화산업은 모든 면에서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완성됐다.

영화는 자유정신을 미국에 퍼뜨렸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고 21세기에는 전 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영화는 자유와 창의력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호흡할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개신교 신앙이 중심이 돼 세워진 미국의 기성세대는 영화의 등장으로 잔뜩 긴장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에 영화가 강력하게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미대륙으로 이동했던 이들은 미국에서 자리잡고 살면서 유럽과 흡사한 새로운 질서와 전통을 만들어 자유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자유가 핵심인 개신교가 오히려 질서와 법칙으로 젊은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준 반면 영화는 무한 자유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이는 나중에 방종이 됐지만 어쨌든 젊은이들은 영화를 통해 자유를 만끽했다.

할리우드가 파워를 얻은 후 도덕적인 해이함을 선동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자유를 담보로 젊은 관객들을 끊임없이 영화관으로 끌어들였다.

종교가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젊은 신자들에 부담을 안겨주는 사이 영화는 거의 종교를 대체할 정도로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스며들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영화는 마치 예배당처럼 여겨졌다. 젊은이들은 영화관에서 자유와 신비를 경험했다.

21세기에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자유보다는 자극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자극으로 더 큰 파워를 얻으려는 노력이 이 산업을 지배했다.

하버드 경영대가 2008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은 연간 5.5회 영화관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고 영화산업은 2006년에 무려 462억 달러 규모의 큰 산업으로 성장했다.




2009 9AOL 머니에 따르면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몸값을 받은 배우는 조니 뎁으로 한 영화 출연에 무려 9,2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톰 행크스는 7,400만 달러를 챙겼다.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종교 지도자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다.

영화는 사회를 투영하는 중요한 스토리 텔링 도구 및 대화 창구로 자리 잡았고 영화에 대한 지식 없이 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할리우드의 태동과 번영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태동과 번영이 아니다. 이는 미국 사회와 전 세계 문화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커뮤니케이션 툴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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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두 2009/09/29 0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밋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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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주 중 가장 중요한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한국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세계 대중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캘리포니아를 모른 채 이곳에서 2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21 캘리포니아]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것인데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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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서 밝은터]



윌리엄 셀릭은 영화 카메라를 불법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 캘리포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다운타운 메인(Main)길에 사무실을 차리고 영화를 찍었습니다. 이것이 할리우드가 태동하는 데 중요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셀릭의 뒤를 이어 불법으로 카메라를 사용하는 영화제작자들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셀릭은 에디슨사가 세운 영화특허회사(the movie trust)에 가입해 자유롭게 카메라 장비를 사용했지만 다른 영화제작자들은 카메라 사용 권리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독립 영화제작자들은 할리우드로 몰려들어 소위 말해 배째라 영화제작을 시작합니다.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환경이 좋아 영화의 수준이 높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할리우드 제작이라는 홍보문구가 있으면 영화 팬들은 신뢰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대체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인정을 받게 되자
LA 인근에는 영화관이 한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관은 니켈로디언(Nickelodeons)’으로 불렸습니다. 니켈(Nickel) 5센트 동전이고 오디언(Odeon)은 그리스말로 극장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영화관 입장료가 5센트라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후 니켈로디언은 수천 개에 달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초기에 큰 돈벌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 영화는 저소득층이 제작해 저소득층 관객을 위한 오락이었습니다. 영화산업은 이후 조금씩 세력을 확장합니다. 특히 장편영화 제작은 영화산업을 더욱 발전하도록 합니다.


1913년은 할리우드 영화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한 해였습니다. 제시 L. 래스키와 세실 B. 드밀이 공동으로 미국 역사상 첫 장편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당시 영화제작자들은 보통 한 릴(One Reel)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 릴은 보통 12분 정도의 분량이었습니다. 래스키와 드밀은 무려 다섯 릴(Five Reel)을 사용해 ‘The Squaw Man’이라는 장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이후 장편영화를 만들려는 제작자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영화특허회사에 속한 제작자들은 영화배우의 몸값이 올라갈 것을 염려해 배우홍보는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독립제작자들은 스타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어 배우 홍보에 열을 올렸습니다. 1910년대에 배우를 보고 영화 관람을 결정하는 팬층이 생겼습니다.


유명 배우들은 일당
15달러에서 주급 1,500달러를 받는 고소득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15년에 캐나다 출신의 글레이디스 스미스는 미국의 애인으로 불리며 연간 50만 달러를 버는 배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팬들은 스타 배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감독은 당시 배우만큼 인정받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유명 감독으로 인정받은 인물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였습니다
. 그가 만든 ‘The Birth of a Nation’은 무려 1억 명이 본 영화로 기록됐습니다. 흥행수익으로 5천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20세기 초반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인종차별적 내용은 이후 큰 이슈가 됐습니다. 이 영화는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쿠 클럭스 클랜(KKK) 조직이 재결성되는 계기를 만들어줬습니다.



할리우드에는 워너 브라더스
, 20세기 폭스, 패러마운트, RKO, 콜롬비아, 유니버설 등의 영화회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이들 회사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경제적인 궁핍으로 시민은 괴로움을 잊기 위해 영화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할리우드가 미국 경제 및 미국인들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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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포니 2009/09/24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바마, 조던, 모두 재미 있네요...좋은 글들이군요.
    공부도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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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주 중 가장 중요한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한국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세계 대중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캘리포니아를 모른 채 이곳에서 2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캘리포니아를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21 캘리포니아]를 연재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것인데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군요.

20-21은 20세기와 21세기를 의미합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하는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지금부터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밝은터]




[20-21 캘리포니아 첫 번째 이야기] 할리우드의 시작과 번영(1)

 

캘리포니아 하면 생각나는 지역은 과연 어디일까요? 로스앤젤레스라고 말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역시 할리우드(Hollywood)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캘리포니아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영화의 도시입니다..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과장을 조금 보태 캘리포니아와 미국을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문화의 흐름을 결정지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예로 할리우드 출신 배우인 로널드 레이건과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정계에 진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면서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Hasta...
Hasta... by Georg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슈워제네거가 할리우드 인기 영화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될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입니다. 영화배우 노조의 위원장이었던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할리우드는 어떻게 지금의 장소에서 자리 잡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할리우드는 자동차 운전으로 LA 코리아타운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이 도시가 과연 어떻게 계획됐을까요. 재미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 영화는 주로 뉴욕에서 제작됐습니다. 토마스 A. 에디슨이 설립한 영화사는 20세기 초반 뉴욕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 에디슨이 고안해낸 촬영 카메라와 프로젝터는 특허권을 인정받아 다른 회사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디슨 영화사는 영화 독점을 꾀했죠. 독점으로 영화 산업을 독차지하려 했던 게 화근(?)이었을까요? 윌리엄 셀릭(William Selig)이라는 사람이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불법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했는데 이에 에디슨사는 변호사를 고용, 이들의 불법 사용을 강력히 막았습니다. 오늘날 CD 음악과 동영상의 인터넷상 유포를 막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셀릭(왼쪽 사진)은 뉴욕과 먼 곳에서 카메라를 사용하면 법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남 캘리포니아(이하 남가주)로 건너갑니다. 셀릭은 LA에서 ‘몬테 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가 카메라 장비 이용료를 내지 않고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자 다른 주에 있는 영화 제작자들도 남가주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가주에 영화 산업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불법 행위를 하기 좋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여차하면 멕시코로 도망갈 수 있는 곳이 남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멕시코로 달아날 수 있는 다른 많은 지역도 있는데 특별히 할리우드라는 지역에 영화사들이 스튜디오를 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1911년까지 할리우드는 조용하고 작은 도시였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이 법망을 피해 남 캘리포니아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 샌디에이고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LA 인근 할리우드를 본부로 했던 이유는 바로 화창한 날씨와 풍부한 자연광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은 LA에서는 좋은 날씨 덕분에 1년 내내 영화 촬영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에 중요한 부분인 조명(자연조명)이 풍부해 최적지임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양한 자연 풍경은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영화 스태프는 한두 시간만 운전하면 눈 오는 산, 사막, 바다를 배경으로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 자체가 최고의 무대였던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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