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블로거는 기억을 남긴다. 기억은 기록이 된다. 기록은 역사가 된다. 이곳에 올려진 광고와 홍보 내용은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Since 2009.04.04 밝은터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Google Book Search

www.flickr.com
This is a Flickr badge showing public photos and videos from ICCsports 사진 업데이트 중. Make your own badge here.

믹시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


믹시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양현승 커넥티드(부록)-TV 인터뷰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2010/02/01 09:35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적십자사 활동 이야기, 청년 시절 이야기, 정치인을 꿈꿨던 이야기

 관련글: 2009/11/27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6)-적십자사 봉사 47년
2009/12/08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7)-미국 정치 참여


 미국 이민 온 이야기, 결혼 이야기, 가족 이야기, 자녀 교육 이야기, 미군 이야기

관련글: 2010/01/04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11)-미군에 입대하게 된 사연
2010/01/18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14.최종)-나의 가족, ‘커넥티드’의 근원


 미군 입대 이야기, 5.18 관련 이야기, 신학대학원 시절 이야기, 미국 방송 출연 이야기, DMZ 이야기

관련글: 2009/12/28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10)-미적십자사 점거 사건


 적십자사 한국과 연계 활동, 판문점 예배 이야기, 4.29 폭동 이야기, 교회 이야기

관련글: 2009/11/14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4)-LA 폭동


 
  LA폭동 관련 이야기, 연극 이야기, 가족 이야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3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4) 나의 가족, ‘커넥티드의 근원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광주 서중 1학년 시절. 서중, 일고에서 역사의식을 배웠고 길렀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아버지 등을 두 팔로 잡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상쾌한 기분이 들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인 내 호주머니에는 작은 돈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자전거에서 나를 내려주시면 이웃에 진 빚에 대해 월 이자를 갚으러 친구 집에 들어갔다. 이잣돈을 전하고 나올 때 친구 책꽂이에 쭉 늘어선  참고서들을 보면서 부러웠다. 아버지께서 빚을 갚으려고 돈을 조금씩 마련하면 아버지와 나는 그런 식으로 빚을 갚거나 이잣돈을 내곤 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사람과 연결되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내 책상에서는 참고서가 한 권 없어도 수업시간에 귀를 쫑긋하고 듣도록 했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 집은 문중의 대장손이었기에 일년에 여덟번 제사를 지냈다
. 어머니는 제사를 모신 다음 날에는 음식을 골고루 싸서 친척 집에 갖다 드리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음식을 날으면서 친척집에 자주 다니게 되었다. 친척집에 다니면서 사람을 아우르는 성품이 길러졌다. 장손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척들을 연결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친구들은 아는 사람이 웅변 원고를 써줘서 웅변 대회에 나간다고 연습을 했는데 나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2층 강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웅변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손을 놓치 않고 나에게 지도를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목포에서 초등학생 대항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집안 사정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웅변 대회 하루 전날 아버지가 웅변대회에 가자고 해서 기차를 타고 간 기억이 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당시에 녹음기가 희귀했을 때인데 뒷담을 뛰어내리면 시내 전화교환대가 있었다. 당시 전화는 교환원이 선을 연결해주던 방식이었는데 교환양 누나들이 녹음기를 놓고 연습하는 것을 보고 그분들에게 “내가 녹음기를  쓸 수 있냐”고 물었다. 교환양 누나들이 쓸 수 있도록 해 나는 녹음기에 나의 웅변 내용을 녹음해서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경험은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아버지는 큰아들로서 씩씩하게 자라도록 나에게 그러한 힘을 얻게해 준 분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4.19가 발생했다. 한밤 중에 우리 집 담 밑에서 누가 쓰러져서 신음을 하고 있었다. 한 데모  참가자가 총상을 입고 우리 집까지 겨우 도망쳐 쓰러졌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우리집 뒷담장을 허물고 그 사람을 우리 집 안에 들어오게 했다. 동생이 갓난아이였는데 기저귀로 쓰려고 했던 천을 꺼내서 그 부상당한 학생을 묶어주는 장면을 목격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의거학생을 돕는 일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번은 여동생이 유치원을 다녀오다가 시내버스에 치었다.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에 버스 운전기사가 우리 집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날은 그 버스운전기사의 어린 아이가 죽은 날이었다. 그 버스운전기사가 용서를 빌러 찾아오자 아버지 어머니는 그 운전사를 다둑거리며 “괜찮다”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그런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용서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두 분은 나에게 바르게 사는 것과 용서 그리고 당당함과 희생이 있는 사랑을 가르친 분들이었다.

1달여 만에 59명의 룸비니학생법회 회원을 확보해 전도왕(?)이 됐던 광주일고 1학년 시절


고등학교 때 나는 활동적인 아이였다. 같은 학년에 기독교 클럽을 만드는 아이가 있었는데 때마침 서울에 계시는 청담 스님이 룸비니 학생 법회를 만들도록 법사님을 광주로 내려 보내셨다. 그는 나에게 “너는 학교에서 활동적이니까 룸비니학생 법회를 조직해서 이끌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당시 나는 내 친구 김민영이처럼 불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거절하지 않고 학생 법회를 조직해 학생 50여명을 모집했다. 40여년이 지난 훗날 한 선배가 보관하다 보여준 그 당시의 사진을 보니 한 달 정도 기간에  법회의 회원으로 50명을 넘게 모집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50명을 넘게 모집하니까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도왕(?)이 됐던 것이다. 청담 스님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는데 당시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학생들이 서울역 까지 환영 배너를 들고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전도 비결을 물었다. 나는 “친한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나는 일이 있으니 참여하라고 말을 했을뿐 이다”고 답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광주일고 2학년 때 나는 2학년 8반 반장이자 학생회 부회장이었는데 어느 날 학급 회의를 통해 반 아이들의 좌석을 정하지 않고 등교하는 순서대로 앉게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박남현 담임 선생님(유도 담당)은 이 안건의 통과를 승인하셨다. 그 담임에 그 반장이었다는 말이 나올만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열린 분이었다. 당시 경험은 훗날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묶어서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만약 담인 선생님이 나의 창의성을 무시하거나 누르셨다면 내가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일을 하는데 머뭇거리고 소심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

청소년기에 성장하면서 내가 평생 살아가면서 사회 생활, 이웃과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이 많이 길러졌다. 이 힘은 부모님의 사랑과 가족을 위한 희생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얻게 됐다. 남동생 3, 여동생 2명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나눈 청소년기의 사랑은 한 권의 책으로도 회고하기에 부족하여 다른 기회에 쓰고자 한다.


 딸 하나 양의 결혼식 영상. 영상의 끝부분에는 두 부부를 위해 특별히 작사, 작곡,
 편곡된 음악이 연주된다. [영상 촬영 및 편집=박병기]


나는 나의 딸 하나에게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온 1세대로 많은 노력을 할 때 2세대들은 부모의 희생에 대해서 일정한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늘 일깨워준다. 그렇게 하면 부담이 될 것 같지만 삶의  폭이 넓어지고 건강한 도전의식을 품을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딸에게 자주 했다. 딸이 결혼 하기  전인 2007 12월 초에 사위 후보와 첫 만남에서 나는 “One Minded Unit, Not Be  Narrow- Minded Individuals”라고  말했다. 한 마음, 넓은 마음으로 서로가 하나 되어서 넓게 생각하면서 북돋우며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아빠 엄마가 이민생활과 결혼생활에서 터득한 것을 이 아이들과 나누면서 건강한 결혼생활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표현으로 요약해서 해줬다. 내 딸아이는 이런 점을 마음에 잘 품고 사는 것 같고 더욱 감사한 것은 사위가 그런 마음을 함께 나누면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민 2세인 딸과 사위가 태어날 아이들에게 우리말(한글)을 가르친다니 그 또한 흐뭇하다.

딸 하나의 결혼식 때 아내, 딸, 사위와 기념촬영을 했다.


지난 2009 3월 딸이 결혼을 했을 때 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오시지 못한 친할머니를 기억하면서 결혼식 가운데 사위가 할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 것은 아빠가 자라면서 그리고 엄마 아빠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과 희생으로 북돋아주신 할머님께 감사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우리 아이는 엄마에게서 음식하는 것을 즐기면서 배운 것 같다. 시댁에서도 잔치가 있으면 자진해서 음식을 해가지고 간다고 하니 기쁘다. 엄마는 생활 중에서 쓰다 남는 것은 가능한 버리지 않고 재활용을 하는데 딸도 엄마를 잘 닮은 것 같아서 감사하다. 딸은 엄마하고 어렸을 때부터 걸스카우트과 적십자사 활동을 함께 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길러져서 고맙다.

초등학생인 딸은 내가 귀가하길 기다리곤 했는데 이날 밤은 너무 늦으니까 노트를 써놓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나의 ‘커텍티드’된 삶을 살도록 헌신한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고싶다. 결혼한 후 35년 동안 아내의 내조가 없었더라면 봉사활동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봉사활동을 하면 가정 생활에 희생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내는 물론 딸도 힘든 가운데서도 잘 인내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25주년 은혼식 때 성지 순례를 가서 가나안 혼례잔치가 열렸던 장소인 포도주 항아리 앞에서 지난 25년을 회고하면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내 마음 속의 필름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아내가 출근할 때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싸주는 도시락이 그렇게 맛있다고 해 고맙게 생각한다. 내 아내가 은퇴할 때까지 시간 되는대로 나의  ‘샐러드’ 솜씨를 계속 발휘하려고 한다.


2009년 성탄절에 딸과 사위 그리고 아내가 함께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찍었다.  

 

추천을 해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으실 수 있습니다.(밝은터)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31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양현승 커넥티드(13)-종교간의 평화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2010/01/18 19:53 | Posted by ICCsports 밝은터

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3) 종교간의 평화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2009 12월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1210일의 일이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성 아그네스 한인천주교회의 이영찬 신부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12년 전에 김세율 신부님도 그렇게 만났었다. 이 성당의 주임이셨던 김세율 신부님이 계실 때도 사제관에서 함께 밥도 먹고 했는데 그날도 식사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오전 1130분에 도착했다. 이영찬 신부님을 찾아뵌 이유는 사랑의 쌀을 배부하는 장소로 LA에 있는 버몬트길과와 애덤스길 사거리의 성 아그네스한인 천주교회의 주차장이 너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앞 장에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LA총영사관, 미주중앙일보, 미주한국일보가  공동 주최하고 미주성시화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나눔의 운동으로 크리스마스 기간에 펼쳐졌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쌀 한 포당 10달러의 후원금을 모아 1만 포의 쌀을 구입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에게 직접 전달하고 독거노인 및 결식아동 등을 돕는 사회봉사단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이영찬 신부님께 함께 그 봉사를 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더니 그분께서 선뜻 받아들이시면서 기뻐하셨다. 이 신부님은 한술 더 떠서 “성당 바로 옆에 흑인 교회가 있는데 양 목사님이 찾아 뵙고 사랑의 쌀 나눔 잔치에 초청하면 어떻게냐”고 제안까지 했다. 나는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화답했다. 내친김에 히스패닉 교회도 연결했다. 이 신부님께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을 하고 그들에게 사랑의 쌀을 같이 나누자고 제안을 했고 곧 푸드뱅크를 하고 있는 매리안 수녀님에게 연락을 취해주셔서 사랑의 쌀 배부 관계를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아울러 미주종교평화협의화가 불자들과 함께 반야사에서도 사랑의 쌀을  나누었다.

종교나 종파와 문화의 차원을 넘는 사회복지 및 인권과 평화 운동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웃종교 리더들과 함께 미주 종교평화협의회라는 단체를 공동으로 조직해 10년 이상 활동했다. 지금 이 구술을 하고 있는 시점에도 가장 활발히 종교평화 및 사회복지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단체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조직됐다. 1997년의 일이다. 당시 북한이 수재를 겪으면서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LA의 한인 사회는 옥수수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그때 옥수수 모금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신교만 할께 아니라 천주교, 원불교 불교 등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나는 김세율 신부님을 만나게 됐다. 박희민 목사님(당시 나성 영락교회 담임) L.A.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사무총장이던 나에게 목표량을 물었을 때 나는 옥수수 1천톤(16만달러)을 목표로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한인 사회는 종교계가 합심해서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고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해 목표액의 두 배를 초과한 36만 달러가 모금됐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에 직접가서 옥수수를 전달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든 생각이 이웃 종교와 함께 활동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도안 스님, 김세율 신부님, 그리고 나 3명이 중심이 되어 북미주종교협의회를 창립했다. 북미주종교협의회는 이후 꾸준하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우리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조선종교인협의회(북한)와 교류를 시작했다. 2002 10월 북미주종교협의회의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한국에 나가서 7대 종교 단체의 대표격인 한국 종교지도자협의회를 방문하고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북미주종교협의회는 이후 미주종교평화협의회로 개칭하고 꾸준한 활동을 했다. 이 단체 안에서 신부님, 스님, 교무님, 목사님이 친해져서 어떤 때는 원불교당에서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어떤 때는 사찰에서 다른 때는 천주교 수도회에 찾아가서 교제를 했다. 그러면서 이웃종교에서 대해서 서로 이해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래서 지금 13년의 세월을 이와 같이 교류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 내용을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가 상세히 소개했는데 구술을 잠시 접고 그 기사를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2009 69일자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 1면에 소개된 내용이다.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생 훈련도 해봤지.” 김현철 스님 <불교·반야사 주지>

“공의를 위해 모이는데 갈등이 생길게 있나요.” 최정안 교무 <원불교·원불교 미주 서부 교구장>

“어디에서도 종교 평화를 위한 마음은 한결 같을 겁니다.” 이태영 신부 <가톨릭·성프란치스코한인천주교회 주임신부>

“기독교 선교사의 하나님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김요한 신부 <성공회·성 프랜시스 성공회교회 한인 목회>

“타종교를 알아야 단단한 신앙을 다져나갈수 있습니다.” 김기대 목사 <개신교·평화의 교회 담임목사>

입성이 범삼치 않기 때문일까. 까만 양복, 로만칼라, 한복, 승복까지 제각각이다.

겉으로 봐서는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인데 서로를 대하는 분위기는 살가운 것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이날 함께 자리한 6명의 단짝은 최정안 교무(원불교), 김요한 목사(성공회), 김기대 목사(개신교), 김현철 스님(불교), 이태영 신부(천주교), 양현승 목사(개신교). 그리피스 파크 오전 산책부터 단짝들의 점심 식사까지 그들의 특별한 우정을 동행했다.

원불교, 성공회, 개신교, 불교, 천주교. 5종교가 허물없이 친구를 먹은(?) 지는 13년째. 미주종교평화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모임은 단체에 국한되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멤버가 바뀌기도 했다. 입적한 도안 스님과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떠난 김세을 신부 김혜봉 교무의 빈자리를 현철 스님 이태영 신부 최정안 교무가 채웠다.

"전임자들이 떠나가기 전에 새 친구를 소개해주고 떠나더군요. 끊어지기에는 너무나 값진 만남이기 때문이겠지요."(양현승 목사) 그렇게 우정은 대를 이어왔다. 계속된 그들의 만남은 결코 형식적이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 외에도 수시로 만난다. 성공회 교회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스님과 개신교 목사가 함께 참석해 성탄절을 축하한다.

큰스님이 LA를 방문하면 함께 인사한다. 각 종교의 행사가 있을 때는 상의도 하고 적극적으로 돕기도 한다. 지난 2월에는 이태영 신부의 형이기도 한 이태석 신부를 돕기 위해 이들 모두 함께 나서 '아프리카 희망나눔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해 오른 그리피스 파크의 분위기는 딱 소풍이다. 최정안 교무가 현철 스님이 맨 빨간색 스카프를 보고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한다. 그 옆으로는 둘 셋 모여 사진 찍기 바쁘다. 오랜만에 산에서 모였더니 기분이 좋단다.

잠시 파크를 산책하다 옹기종기 크고 작은 돌 위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 때가 멀지 않아서인지 역시 밥 얘기가 먼저다. 평소에도 순번제로 밥을 산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홀애비들이 많이 사지."(김요한 신부) 이태영 신부와 현철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시 함께 밥을 먹어야 친해진다는 얘기다. 이어 반야사 칼국수와 원불교 산채무침이 화두에 올랐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웰빙 음식이라고 신부와 목사가 자기네 집 솜씨인양 떠들석하게 자랑이다. "내일 칼국수들 먹으러 오시오."(현철스님) 송월주 스님 대접하려 칼국수를 만드니 오라는 말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정안 교무가 누구누구 갈꺼냐며 교통정리다. 친구들이 맞다.

이들의 모임은 장소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일년에 한 번은 도시를 벗어나 함께 캠핑을 한다. 텐트며 먹거리를 싸들고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주 보는 데도 할 이야기들이 많단다.

양 목사가 내친 김에 자랑을 시작했다. "지난 5월에 딸이 결혼식을 했는데 누가 축가를 했는지 아십니까. 하하하." 목사의 딸 결혼식 피로연에서 목사와 스님 신부가 함께 '사랑으로'를 축가로 불렀단다. 너무 좋은 모습이었다며 사진도 한 장 보여준다. 진짜다. 하객들이 한편으론 놀랐지만 한편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며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6월 말이면 한국 나병 환자촌으로 떠나는 이태영 신부와 이별을 앞두고 아쉽기만 하다. "떠나긴 하지만 장소만 다를 뿐이지 한국에서도 하나의 모임을 만들어 종교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이태영 신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대화가 시작됐고 식사가 나왔다. 다른 종교가 모였으니 함께 기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오늘은 김기대 목사가 한국으로 가는 이태영 신부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모두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각기 다른 신앙을 가졌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이웃 종교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이다.

여전히 다른 믿음을 가진 종교, 그것도 지도자들이 모였으니 논쟁이 잦지 않느냐는 기자의 의구심 어린 질문에 “공의를 위해서는 종교를 떠나 뜻을 한데 모읍니다. 종교를 위한 종교는 안됩니다.(최정안 교무) 반박할 것도 없이 깨끗하게 못박는다. 모두가 명쾌한 대답에 수긍하는 눈치다.

이들의 열린 마음은 1~2년 사이에 생긴 것이 아니다. 현철 스님은 다른 종교를 알기 위해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 체험을 했다. “인류역사를 봤을 때 전쟁의 3분의 2 이상이 종교전쟁입니다.

지금도 80~90%는 종교적인 갈등이나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대화와 이해가 부족합니다. 자기 종교가 좋다고 독선에 빠지는 건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는 모르고 자기종교만 안다는 것은 자기 종교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현철 스님)

김기대 목사 역시 석사학위는 불교로, 박사는 한국 종교사로 받았다. “다른 종교를 알기에 더욱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김기대 목사) 다른 종교를 안다고 해서 결코 자기 종교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LA를 방문한 송월주 스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인사를 위해 두 손을 합장해 보였더니 오히려 스님이 악수를 청하시더군요.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양현승 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어느 곳에도 안 계신 곳이 없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섬겼다. 기독교 선교사의 하나님만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찾은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너희가 찾은 하나님은 엉터리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김요한 신부)

“그렇죠. 엄마는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리지 않죠. 누구에게는 며느리고 또 누구에게는 딸이고 아내예요. 이렇게 한 명에게 여러가지 호칭이 있듯이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하느님)도 지역과 제도와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달리 나올 뿐이지 같은 분이라고 봅니다.(최정안 교무)

1997년 도안 스님과 김세을 신부를 위시로 창립됐으며 종교화합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북한의 인권과 구호와 이민사회를 위한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쳐왔다. 지난 해에는 제1회 미주종교평화협의회 상을 제정하고 종교의 평화를 위해 힘써온 김광준 신부에게 그 상을 수여했다. 현재 양현승 목사가 상임대표를 맡아 단체를 이끌고 있다.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


이 기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한인 사회 안에서 종교 평화의 역할을 맡으면서 동시에 타 지역의 종교인들과도 꾸준한 교류를 했다. 2004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아시안종교인평화회의에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3명의 대표단을 파견했으며 2008년 12월 뉴욕 유엔 아동기금(UNICEF) 강당에서 가진 유엔 산하 종교 NGO 관계자들의 합동 세미나에 나를 파견했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와 종교평화국제사업단(IPCR)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는 100여명이 참석, 다양한 종교들이 평화구축, 개발계획, 인권보호 등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윌리엄 밴들리 WCRP 사무총장, 유엔 종교 NGO 위원장 조앤 커비 수녀, 알렉산더 앰브러모이 모스코바 주교회의 대표단 사무총장, 세이이드 시이드 북미이슬람협회 사무총장 등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UN종교 NGO모임에서 상호협력을 논의한 윌리엄 밴들리 WCRP 사무총장(사진 오른쪽).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미국종교평화협의회의 가맹단체로 가입토록 도왔던 허츠 유대교연대 공동의장(사진 왼쪽). 


이후 2009년 2월에는 WCRP 공동대표 겸 유대교연대 공동의장인 주디스 허츠 씨의의 추천으로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미국종교평화협의회의 가맹단체로 가입됐다. 상호 연결해서 공동으로 일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판단해 나는 미국종교평화협의회 가입에 정성을 기울였다.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결성되자 극한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연락이 오곤 했다. 괌에  KAL기가 추락했을 때 미국적십자사 워싱턴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면 좋겠는가, 유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천주교, 불교, 원볼교, 개신교 대표가 컨퍼런스 콜을 해서 어떤 종교 의식인가 논하는 것 보다는 그분들을 따뜻하고 정중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해줬다.

또한 김수한 추기경님이 선종 했을 때와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미주종교평화 협의회가 미주 지역 종교의례를 책임졌다. .


앞서 소개했지만 우리는 단순히 공의를 위한 종교적인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연말이 되면 함께 모여서 노래방 기기를 설치하고 노래자랑 대회도 열어 기쁨을 공유한다. 월례 정기회를 하고나서 영화 ‘국가대표’를 함께 감상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다보면 이웃 종교를 안다는 게 자신의 종교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 종교를 더 잘면 알수록  이웃종교인들이 귀하게 여겨진다. 그들 모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천주교 신자님들이 교류하는 웹사이트에도 등록해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지 모른다. 얼굴을 모르는 분들인데도 서로 존중하는 대화가 오고갈 때 삶의 행복감을 풍성히 누리게 된다. 나의 회고록을 인터넷에 올리자 천주교 신자 모임의 이화라는 분이 오셔서 따뜻한 댓글을 올려주신 일을 잊지 못한다.

관련 기사


'
사랑의 쌀 1만포' 종교의 벽도 허물었다
[LA중앙일보]
2009년 12월29일



한인사회와 단체들이 하나되어 만들어낸 '사랑의 쌀' 1만여 포가 남가주 전역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200여 사회.종교단체를 비롯해 한인들이 후원한 이번 캠페인이 이뤄댄 소득은 여럿 있겠지만 범종교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교계 관계자들은 높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 23일 한인타운 인근의 성아그네스 성당에서는 400포의 쌀이 한인들을 비롯해 히스패닉과 흑인 등의 이웃들에게 전달됐다.

이날 배포를 위해 모인 곳은 성당. 쌀을 나누는데 손길은 보탠 이들은 바로 개신교계와 불교계 원불교계의 성직자들이었다.

남가주 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종교단체들은 다 모인 셈이다.

이들 모두는 다른 종교에 속해있지만 이날 만큼은 하나가 되어 쌀 한 포 한 포를 이웃들에게 나눠주는데 힘을 모았다.

이날 성아그네스 성당과 반야사에서의 배포를 맡아 일한 양현승 목사(미주종교평화협의회 상임대표)는 "다양한 악기의 소리를 지휘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종교간의 또 인종간의 화합도 잘 지휘될 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오늘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참여해 나눈 이 현장에서 화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배포에 참여한 원불교 최정안 교무는 "범종교적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 앞으로 더 자주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여기 나와보니 이 캠페인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고 강조했다.

남가주 사원연합회 회장인 만성 스님 역시 "종교를 초월해서 같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 행사 속에서 훈훈한 정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 이날 배포에 참여한 박세헌 목사는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힘쓰셨다. 나눔은 종교를 초월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앞으로 교포 사회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의 무브먼트가 일어났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성 아그네스 상당의 협력으로 한인들 뿐 아닌 히스패닉과 흑인 등 타 인종들도 혜택을 받았다.

성아그네스 성당의 매리안 수녀는 "이웃들에게 좋은 양식을 나눠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한인 커뮤니티의 관대함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인근에 살고 있는 한인 노인들 역시 이날 혜택을 받기 위해 작은 카트를 하나씩 끌고 차례를 기다렸다.

성아그네스 성당 인근 노인아파트에서 18년간 혼자 살고 있다는 박명일 할머니(79)는 "성당 할머니(성아그네스 성당 수녀)가 티켓을 줘서 왔다"며 "평소에는 양쌀을 배급받아 먹는데 귀한 한국쌀을 받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말했다. 할머니는 이어 "올해부터 정부지원이 많이 끊어져 힘들었는데 (쌀을)귀하게 먹겠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글. 사진: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

미주종교평화협의회 활동 내용

♡ 김요한 신부의 홈리스 사역을 돕기위한 불교합창단의 기금모금 음악회를 도움.
♡ 2010년 1월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과 공동으로 학술대회 개최 및 2010년 인구센스 캠페인의 적극적인  참여도 계획 중.
♡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불교계에서 펼치는 지구촌 공생회(대표 송월주 스님) 활동과 천주교의 미주아프리카후원회 돕기에 참여 중.
♡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 의해 억류된 한국인 인질들의 석방 촉구 기자회견을 회교 지도자들과 가짐
♡ 겨레얼살리기 세계한민족대회 참가, 위안부 하원 결의안 (HR121)통과를 위한 캠페인 및 기금모금 등에도 참여.
♡ 천주교인이었다가 출가한 현각스님 초대해서  대화를 나눔.

[자료제공: 미주종교평화협의회]

  미주종교평화협의회의 아이티 지진재해 현장 봉사단의 일원으로 2010년 2월 아이티에 다녀왔다. 아이티 지진 생존자들이 임시 숙소(텐트)에서 거처하고 있는 현장에서 쌀을 나눈 후에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참여했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은 즐겁기 때문에 현지에서 운전해준 안드레아 씨가 노래를 부르자 나도 아이들과 어울려서 르네 선교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2010년 2월20일 촬영. 사진 제공=한요한 선교사.

 사진 윤관명 교무 촬영


추천을 해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밝은터)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3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2) 월드비전과 연극 활동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내 인생에서 월드비전과의 10년 인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월드비전과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연관을 갖고 일할 기회가 있었다.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민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설립된 기독교 계열의 국제 구호 개발 기구다. 월드비전의 목표는 "모든 사람, 특히 어린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일하는 것(working for the well being of all people, especially children)."인데 6대륙에 지부가 있는 기독교 구호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 중 하나다 2007년 예산이 2억 6천만 달러였으니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1월20일 미주 한국일보 기사. 당시에는 월드비전이 선명회로 불렸다.


내가 월드비전에서 봉사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0년대에 임동선, 차현회, 황성수 목사님이 한국 월드비전(당시 명칭 선명회)의 요청으로 북미주 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무총장으로 봉사해주길  부탁을 했다. 당시 임동선 목사님이 회장이었다.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1993년 말에 태동의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사랑의 빵 운동’을 첫 사업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데니스 한씨를 유급직원으로 채용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미 전국적으로 사랑의 빵 저금통을 배포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를 때 미국 월드비전에서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미국에서 일하기에 운영할 수 없다는 지적을 했다.

이미 수개월 동안 활동을 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우리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임동선 목사외 차현회 목사가 나에게 “미국 월드비전과 이와 관련한 대화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나는 미국 월드비전의 회장을 만났다. 로버트 사이플(Robert Seiple) 회장과의 대면에서 그는 나에게 강력하게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회장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회장에게 “운영을 중단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나는 미국적십자사와 미국보이스카우트의 조직체제를 알고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곧 받아드릴 수 있었다. 북미주위원회에 총재와의 대화 내용을 알리고 이 일을 그만 두자고 제안했다. 한국 월드비전의 북미주 위원회는 그렇게 중단됐다. 그때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 했으나 순리적으로 총재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 훗날 미국월드비젼 코리안 데스크가 발족되는 길을 열어놓는데 기여하게 됐다고 믿는다.

1995년에 월드비전의 도린 영 부회장이 직원과 함께 내가 운영 중이던 샬롬 커뮤니티 센터를 찾았다. 미국 월드비전이 처음으로 북한에 곡식을 보냈는데 이미 선적되어 북한으로 가고 있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미국 월드비전으로 텔렉스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을 들고 부회장이 나를 찾았던 것이다. 텔렉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곡식이 도착하더라도. 북한 당국과 어떤 상의가 있을 때까지는 곡식 보내준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도린 영 부회장이 나를 찾아와서 미국월드비전의 어드바이저로 위촉을 하고 나에게  “북한 관계를 위임할테니까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일을 위해서 유급 직원과 사무실 그리고 무료 전화 등을  제공하겠다는 조건도 아울러 제안했다. 1995년 5월 12일자로 북한에서 미국월드비젼에 보내온 ‘Friendship Food for N. Korea’제목의 탤랙스를 검토한 후 나는 곡식 보낸 것을 외부에 노출하지 말라는 북한의 부탁을 지키도록  도린 영 부회장에게 조언했다. 나는 이미 1991년에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북한 스타일을 잘 알았기에 그렇게 충고를 했다. 내가 당장에  미국 월드비전 과 좋은 조건으로 일을 하는 것 보다는 북한과 신뢰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 월드비전 도린 영 부회장에게 “북한하고 신뢰가 깨지면 안 되기에 나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후 북한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외부에 곡식 지원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6년 쯤에 월드비전이 시애틀로 본부를 옮기기 위해서 새로 건축을 하고 봉헌식을 했다. 그때 그간의 봉사와 조언에 감사한다는 공문과 함께 나를 초청했다. 나는 새로 건축된 빌딩을 둘러싸고서 봉헌식 테이프를 초청받은 인사들과 함께 끊었고 지역 신문과 인터뷰도 했었다. 한국의 .6.25전쟁이 계기가 되어서 발족한 월드비젼이기에 나의 참석은 미국 기자들의 눈에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월드비전은 한인 2세인 조나단 심 씨를 채용했다. 조나단 심 씨는 월드비전 코리아 데스크의 책임자가 됐다. 미국월드비전의 고문으로 봉사하고있던 나는 정남식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코리아 데스크의 위원이 되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인이 된 조나단 심 씨, 그 오른쪽 옆이 정남식 목사, 그리고 필자


우리는 시애틀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고, 코리아 데스크를 위해 각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미와 콩나물’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던 김혜자 씨를 초청해서 기금 모금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제안을 했다. 장미와 콩나물은 MBC-TV에서 1999년 3월13일부터 1999년 9월 5일까지 매주 토,일 밤 8시에 방영했던 주말연속극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 드라마가 인기리에 종영이 된 시점이었고 김혜자 씨는 월드비전 친선 대사로 봉사했기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혜자 씨는 당시 북한을 방문한 직후였다. 그래서 나는 이 행사 이름을 ‘눈물 젖은 외출’로 정하자고 했다. 이전까지 나는 김혜자 씨를 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배우 임동진 씨가 뮤지컬을 미국에서 공연하고 싶어서 나를 초청하고 리셉션이 있었을 때 김혜자 씨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솔직히 당시 배우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배우와 인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연극과 연관되어 살았다.

잠시 과거 나의 연극활동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1964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데모(‘6.3사태’)를 주도한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 친구가 대학연극의 연출가이었고 나는 그 친구와 어울리며 연극에 심취하게 됐다. 연출가인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연극을 하는 서울시내 각 대학의  대학생을 연결해서 극단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학생들을 모아서 ‘대학극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참여했던 사람 중에서 지금은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백윤식 씨, 드라마센터의 양서화 씨 등이 있었다.

친구의 희곡작품이 문화 공보부에서 주최한 희곡기금공모에서 당선작이 되어 우리는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올리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연극 제목은 ‘연이 불타는 계절’이었다. 친구 최헌진은 자신이 쓴  희곡을 연출했고 나는 기획을 맡았다. 그 당시 최헌진(현재 정신과 의사)을 통해서 그의  후배였던 김석만 씨 등을 만나게 되었다. 김석만 씨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이다..

나는 기획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였다. 한번은 국립극장에서 연극이 시작하기 직전에 소품이 부족해서 객석에서 빌린 적도 있었다. 여배우에게 필요했던 악세사리가 없어서 객석에서 빌릴 수 있었다. ‘석학’이라는 작품을 했을 때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는 여자 주인공을 캐스팅하지 못해 소위 길거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친구 최헌진에게 “길거리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배우후보를 보게 되면 내가 섭외하겠다”고 말했다. 광화문 크라운제과 앞에서 여배우 후보를 오랜 시간동안 살피고 있는데 친구가 “저 사람인데 목소리가 허스키해서 안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여학생을 따라서 빵집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들어보니 연세대 응원단 리더였다. 나는 그 쉰 목소리는 응원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판단하고 섭외에 나섰다. 그는 사실 연대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였는데 그때 연고전의 응원을 맡고 목이 쉬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 “연극 끝날 때까지 사적인 것을 묻지 않고 당신의 이름마져 묻지 않을테니 여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분은 나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배우로 캐스팅돼 연극 무대에 섰다.



미국으로 이민 온 뒤에도 연극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나는 계속 연극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런 관계를 통해 내가 참여하게 된 작품이 1992년 4.29 폭동 직후 인종 화합을 위해 이중언어로 공연한 장소현 씨가 쓴 ‘민들레 아리랑’이었다. 이 작품은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김석만 교수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와 있을 때 연출을 맡게 되었다.

김석만 교수는 옛날 친분으로 나를 만나러 샬롬 커뮤니티 센터에 왔다가 구제 사업을 하던 나의 모습을 보고 깜짝 제안을 했다. 그는 내가 생필품 등을 흑인 라티노 한인 구분 없이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나에게 갑자기 “목사님이 무대에 서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얼떨결에 허락을 했고 나의 출연으로‘민들레 아리랑’의 제7장이 새로 씌어졌다. 내가 작품의  두 주인공과 함께 인종 화합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연극계 여건은 척박하다. 하지만 LA에서 연극인들이 극단을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고 활동하기를 원해서 2004년에  ‘극단 LA’를 창립하게 되면서 나는  이 극단의 대표가 됐다. 극단의 모든 일원들은 열심을 냈다. 5년이 지난 2009년 11월에는 뮤지컬 ‘LA 자 살자 관광버스’라는 작품을 한 달 동안 올리게 되었고, 남가주농아교회 교인들을 초청해 연극 전체를 수화로 통역해서 함께 할 수 있었다. 연극과의 관계를 좀 더 얘기하면 나는 1990년대에 한국의 ‘장보고’라는 뮤지컬을 LA 한인 사회에서 공연하도록 기획을 맡았다. 탤런트 임동진 씨(현재 목사))가 장보고 역으로  그리고 요즘  ‘다함께 차차차’에서  열연 중인 박해미 씨도 당시 이 뮤지컬에 참여했다.

뮤지컬 장보고(단장:김의경) 환영만찬의 사회를 보는 양현승. 원 안에 두 분이 박해미씨와 임동진 씨다.


다시 월드비전 이야기로 돌아오면 당시 ‘장미와 콩나물’이라는 드라마가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김혜자 씨를 초청했다. 오재식 한국 월드비전 회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일이 성사가 됐다. 내가 총무로 있던 세계 복음 선교 연합회 주관으로 LA에 있는 동양선교교회에서 토크쇼 스타일의 기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갖는 행사 그리고 북한을 다녀와서 북한의 어린 아이를 도와달라는 행사는 보고식의 딱딱한 집회가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양하고 교회 예배당에서 갖는 행사였지만 토크쇼 스타일로 진행했다.

나와 김혜자 씨가 교회 예배당 중앙 무대에서 토크쇼를 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 당시 새벽에 김혜자 씨를 깨워서 인터뉴스 커뮤니케이션의 지원으로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문자 생중계를 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토크쇼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면서 종영을 한 ‘장미와 콩나물’중  콧날이 시큰하게 하는 한 장면을 행사 참석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팬들과 인터넷 채팅을 했던 당시 김혜자 씨가 잠시 기념 촬영을 했다.


이를 위해 그 연속극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비디오 테이프를 5개 정도 빌려다가 꼼꼼히 보게 되었는데 김혜자 씨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중 인상이 깊은 부분을 편집하도록 해 집회에 참여한 분들에게 보여줬다. 반응이 뜨거웠다.

그 행사는 동양선교교회 예배실 모든 좌석을 꽉 채웠고 입석도 모자라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았다. 미주 중앙일보, 미주한국일보의 톡톡 튀는 광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TV와 라디오 등 모든 한인 언론사를 통한 그야말로 홍보 대박이었다. 나는 LA 일정에서 김혜자 씨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김혜자 씨가 집회를 끝내고 뉴욕 집회를 위해 LA 국제 공항에 함께 가면서 뉴욕 집회도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나와 내 아내는 그저 웃기만 했다. 김혜자 씨에게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뉴욕 집회에는 많은 분이 모아지 않았다고 했다. LA에서는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 월드비전의 고문과 코리아 데스크의 고문으로 일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월드비전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 조나단 심 씨와 미 전국을 다니면서 월드비전 코리아 데스크를 알리고 조직을 만들었던 일 등은 지금도 내 마음에 생생히 남아있다.


 조나단 심 씨가 자녀에게 남긴 동영상.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조나단 심 씨는 시애틀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이후에도 봉사관계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교제를 했다. 조나단 심 씨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위해 선물을 보낼 정도로 친분이 쌓였다. 그는 월드비전 일을 위해 함께 하면서 나를 멘토라고 불렀다. 그는 나의 경험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장래가 촉망되고 따뜻한 가슴을 가졌던 조나단 씨를 이제는 더 이상 이땅에서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여러 차례 구호현장을 찾아 열악한 상황에서도 강행군을 했던 조나단 씨는 누적된 과로와 설사에 따른 심한 탈수증세가 겹쳐 2005년 7월 3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뇌수술을 받았지만 7월26일 뇌사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조나단 심 씨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냈던 이메일을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곧 꼭 뵙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한 채 그리고 세계의 어려운 어린 아이들을 둔 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내게  부탁하는 그의 음성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그래서 월드비전은 아니지만 지구촌 공생회와 수단 어린이들을 돕는 아프리카희망후원회  및 사랑의 쌀 운동  등을 통해 2009년에도 나는 1997년 12월에  조나단 씨기 쓴 편지를 요즈음도 읽어보면서 봉사한다.

조나단 씨는 진지한 마음으로 늘 감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카드로, 때로는 이메일로, 때로는 전화음성으로 때로는 정성이 깃든 작은 선물로 잊지 않고 감사를 했던 분이었다. 쉽게 들릴 수 있지만 바삐 살다보면 그런 표현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지구촌의 불쌍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토록 헌신했던 조나단 씨를 기리는 마음이  내가 월드비전과 관계를 아름답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 동안의 월드비전 봉사는 그렇게 마무리지어졌다. 나는 월드비전과도 적십자사처럼 평생 인연을 맺고 싶었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추천을 해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으실 수 있습니다.(밝은터)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2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 블로그가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주셔요.

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1) 미군에 입대하게 된 사연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내가 DMZ에서 세례를 받게 된 사연이 있다. 나는 미국적십자사 점거 사건 2년 전인 1978년 한국 비무장지대(DMZ)에서 미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께서 내 동생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취셔서 나는 어떻게 하면 동생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킬까 고민하다가 시민권을 빨리 받을 수 있는 미군이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바 있는 나는 미군에 지원하게 됐다.

미군이었을 때 동료들과 기념촬영. 빨간색 원안이 31세 미군 양현승 목사.


나이
30세가 넘어서 들어가게 된 군대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사병 훈련 중에 체력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4종목에서 모두 합격해야 정식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철봉타기, 윗몸 일으키기, 푸시업, 그리고 1마일 달리기에서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4종목 모두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특히 1마일은 처음에는 12분이 나왔다. 도저히 합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병 훈련 한 달을 받고 시험에서 통과를 못하니까 중대장이 나를 불렀다. 중대장은 나에게 “너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선택이 하나 있다. 특별 훈련소에 가서 체력훈련을 받은 후에 이쪽으로 다시 오든가, 집으로 돌아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특별훈련소의 책임 장교에게  31세의 나이에 내가 미군에 온 것은 시민권을 받아 가족을 초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동안에 시민권 수속을 해야 할 일이 있으 면 이민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는 특별 외출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특별 훈련소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잠잘 때까지 완전군장을 하고 하루 종일 운동을 하며 체력을 단련했다. 훈련 조교는 “미군 세금을 축내겠느냐 열심히 하겠냐”고 독려하며 내가 몸만들기에 매진하도록 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마일( 1600m) 달리기에서 합격했다. 이전에 1마일을 12분에 달렸던 나는 특별 훈련소에서 630초에 끊었다. 3주 동안 열심히 운동하니까 그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연일 뜨겁던 조지아주의 날씨도 내가 측은했던지 도와주었던 것이다. 1마일 시험을 보던 날 뙤약볕 같은 여름 날에 비가 촉촉히 내렸다. 비가 와서 좋았고 나는 딸 이름인 하나를 부르면서 열심히 달릴 수 있었다. “하나야, 아빠 뛴다!” 이렇게 스스로 응원을 했다.

남은 2종목도 패스를 했는데 마의 종목인 철봉 타기가 남았다. 이상하게 철봉에 매달려 전진하다보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훈련관은 “앞으로 전진한다고 생각하며 가야 하는데 너는 떨어질까봐 걱정한다”고 조언을 했다. 그 말을 믿고 나는 전진하는 데 집중했다. 놀랍게도 전진을 잘하게 되었다. 독립기념일 연휴가 있어서 다른 훈련병들은 집으로 단기휴가를 갔는데, 나는 처량하게 훈련소에 남아 있었고 철봉 타기 시험을 보게 되었다. 철봉. 시험을 보는데 훈련관이 “이미 숫자가 넘었으니 안 해도 된다”고 말했고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치 씨름 선수가 천하장사가 된 순간처럼. 모래 주머니를 잡아서 공중으로 던졌다. 훈련관이 “너 기물파괴를 해서 감옥에 가고 싶냐”고 농담하면서 함께 기뻐해줬다. 나는 당장 짐을 챙겨 본 부대로 복귀했다.

나와 함께 입소했던 사람들은 기초 훈련이 거의 끝나는 시기였다. 결국 나는 다음 기수로 넘어갔고 새롭게 훈련을 받게 되었다. 새 기수에서 나는 고참처럼 여겨졋고 훈련병 중 리더인 근무병으로 지냈다. 훈련병 중 리더가 되니까 특전이 주어졌다. 보통 한 방에 10명씩 자는데 나는 2명이 자는 방에서 잘 수 있었다.

미군체력장훈련이 2009년에도 유효하다. 2009년에 양현승 목사의 집에서 보여준 '거뜬한 철봉 솜씨'.


본래 내가 받은 병과는 법정 서기였다
. 당시 미군에서는 자신의 병과를 선택하는 혜택을 받으면 첫 번째 훈련 후에 갈 수 있는 근무지를 선택할 권한을 잃어버린다.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었기에 한국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더니, 병과를 포기하라고 해서 받은 것이 엉뚱하게도 전화 가설 통신병(36K)이라는 병과였다.

통신병이 되기 위한 훈련은 그 어느 사병 훈련보다 고됐다. 조지아주에서 훈련을 받는데 막사에서 훈련장까지 가는 동안 일부러 모래사장을 걸어서 전화 가설에 필요한 장비를 양쪽에 메고 모래 위를 걷는 훈련을 했다. 뜨거운 여름 날씨는 나에게 큰 어려움을 줬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결과 전봇대의 꼭대기에 철모를 올려놓기 위해서 끝까지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시험을 내가 제일 먼저 통과했다. 나이 많은 내가 이 시험을 통과하자 다른 어린 훈련병들이 그것에 자극이 되어 그 훈련장에서 전원이 시험에 통과했다. 전 훈련원이 나를 헹가레 치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 생생하다.

1978년 3월20일 DMZ에서 세례를 받았던 내가 12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밀러 군목과 함께 기도한 내용은 미육군 신문에 상세히 소개됐다. 사진 왼쪽은 내가 세례를 받는 장면. 오른쪽은 내가 밀러 군목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다.


나는 바람대로 한국에 나갔고 DMZ에서 미군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때 조 밀러 군목/대위를 만나게 됐다. 사연은 이랬다. 훈련을 나갔을 때 아내가 내 안부를 묻는 전화를 우리 부대에 했다. 그 상담자로 밀러 군목이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얼마 후 내가 야전 훈련을 받고 있는데 헬리콥터가 내리면서 밀러 군목이 나를 찾았다. 밀러 군목은 “네 아내가 네 걱정을 하는데 어떤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 일이 인연이 돼 나는 밀러 군목과 친해졌고 이후 사순절 기간에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1978 1월 중 한 주말에  나는 임진각 너머에 있는 DMZ에서 외출을 나가지 못한 채 부대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잔잔한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때 자연에 대한 어떤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 바로 우리 부대  건너편에 있는 북한 병사들이 생각났다.

그 눈이 내리는 순간에 이와 같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함은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가능케 됐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교회를 들락날락하면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었던 말이다.

그 순간 예수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을 갖고 사순절이 되었을 때 군목을 만나 그 경험을 말하니까 밀러 군목은 “네 마음에 예수를 만난 것 같다”며 세례 받을 것을 권면했다. 그게 첫 번째 상담 내용이었다. 이후 군목실을 다른 때보다 더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럴 즈음에 DMZ에 있는 부대에 미 육군 전체 군목 책임자인 군종감인 준장이 방문했다. 밀러 군목과 나는 부활절에 세례 받는 것에 대해 상의했다. 부활절 세례를 상의하고 난 뒤에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내 마음 속에 분단된 조국의 한 복판에서 세례를 받고 싶은 생각이 나서 군목에게 말했더니, “그러면 북한 병사가 있는, 군사분계선 바로 앞인 공동경비구역(JSA)안쪽의 철책 앞 초소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그곳을 들어가려면 군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부활절 전날 밀러 군목이 나에게 “부활절 예배 직 후에 병기실에 가서 방탄복을 입고 권총을 수령해서 차고 완전무장을 하고 들어가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부활절 예배를 끝내고 밀러 군목이 지프차를 직접 운전해 우리는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들어갔다. 초소에 있는 병사들을 위해서 밀러 군목은 다시 한번  예배를 드린 후에 군사분계선 최북단에서 세례를 하겠다고 하고 초소에서 근무하던 소위에게 입회를 하라고 했다. 밀러 군목이 나에게 “소망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이 DMZ Zero Point  Zone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군사분계선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DMZ에서 조 밀러 군목/대위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장면


북한 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미 육군 수통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례를 받았다. 밀러 군목은 이 사실을 육군 본부에  보고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밀러 군목 자신이 소속된 연합감리교 본부에도 이 내용을 보고를 했다고 한다.

미군으로 있으면서 한국 카추사들과 한 부대에서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면서 친해졌다. 또 미군과 사귀는 한인 여자 친구들이 임진각을 못 넘어오면 나를 통해 미군 남자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한국인 여자 친구가 영어가 부족하면 내가 중간에서 통역 역할을 맡기도 했다.

군대 안 막사는 침대가 2층 침대로 되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때로는 인종이 다른 미군들 사이에 문제도 발생했다. 그럴 때 나는 서로 친구가 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면 같이 근무했던 사병들은 나보다 10살 이상 많았기에 그들을 동생처럼 다둑거리며 조언도 해주었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이국 땅에 있는 어려움을 호소하면 아픈 마음을 들어주기도 했다.

19세의 어린 흑인 병사의 경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어서 군대에 오게 됐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부모와 자식은 나간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네가 오늘이라도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한국에서 인쇄된 카드를 건네줬더니 좋아했다. 쓸 말이 없어서 인지  망설이기에 내가 카드 내용을 불러줬더니 그 흑인 병사는 씩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카드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또 웨스트포인트를 갖 졸업한 소위가 왔을 때 마치 어설픈 사관생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를 한국군 그리고 미국군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내 자신도 고달팠던 순간이 있었다. 새벽이면 중대원들과 함께 임진각 입구 까지 구보를 하면서 서울에서는 모두 잘 자고 있을텐데 나는 DMZ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었다. 당시 내 아내는 군에서 가족수당이 지급되어서 한국에 나와 살고 있었는데 한번은 임진각이 차단돼 외출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인이기에  민통선에 들어오는 동네버스를 타고 몰래 임진각을 넘어서 마음을 조이며 가족을 보러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딸의 돌잔치에 겨우 참여할 수 있었다.

     "딸의 돌잔치. 나는 이 뽀뽀를 백만불짜리 뽀뽀라고 생각한다."


군 제대를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밀러 군목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 미국적십자사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나는 한국 적십자사에 일이 있어서 나가는 길에 밀러 군목을 찾아뵈었다. 이전에는 밀러 대위였는데 당시 밀러 중령으로 승진해서 다시 한국에 나와서 미 2사단 책임 군목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동두천에 있는 밀러 군목의 숙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미군을 위한 영어 예배와 카추사를 위한 우리말 예배에 내가 설교를 했다. 밀러 군목은 2사단에 있는 미 군목들을 소집해 서 그들과  함께 DMZ로 가서 내가 세례를 받았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자리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그때 세례를 받은 곳을 방문한 후 군사정전회담장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어떤 일이 발생하여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그곳을 못 들어가게 됐다. 나는 웃으면서 “나는 곧 가까운 장래에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미국 장로교와 연합감리교  관계자들이 함께 북한의 조그련(조선 그리스도 연맹)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게되었고 개성에 내려갔을 때 군사정전회담장에 가게 되었는데 밀러 군목/중령에게 말한 내용이 1년 후에 실현되는 작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공동경비구역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군사분계선에서 '조국은 하나'임을 외치고 있는 임수경 학생과 문규현 신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양현승 목사는 1991년 방문시 판문점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나는 미국 군대의 경험을 통해 조직 내에서 어떻게 리더가 되고 참여자가 어떻게 협력을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장교와 사병의 관계, 사병과 사병의 관계, 상하 관계, 동료 관계를 통해 배운 것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조직도 배웠다. 군대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배웠다. 내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군대에 갔지만 나는 ‘미군은 나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미군이 건강식을 제공해줄 것이고 아프면 의사도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당시 고된 훈련을 통과했기에 훗날 다른 일을 할 때 고된 일에 대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추천을 해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으실 수 있습니다.(밝은터)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ADDRESS : http://iccsports.com/trackback/52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뭇가지 2010/01/05 0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